진뫼마을 고향편지

십 원어치, 이십 원 어치 망원경 보여주던 ‘벗거지 양반네 가게’

버들개지 2007. 11. 21. 10:31
십 원어치, 이십 원 어치 망원경 보여주던
‘벗거지 양반네 가게’

▲ 중전마을 방앗간
ⓒ 김도수


내 고향 진뫼마을엔 옛날에도 지금처럼 가게가 없었다. 마을에서 학용품을 살 수 없으니  학용품을 사려면 지름길인 강변 오솔길로 가지 않고 마을 앞 몰무동에서 동무들과 헤어져 멀리 중전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중전마을엔 간판도 없는 가게가 두 군데
진뫼에서 5리쯤 떨어진 중전마을에는 간판도 없는 가게가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버스 정류소 바로 옆 허름한 집‘박씨네’ 가게였다. 그 곳에선 얼굴이 동그랗고 통통한 누나가 학용품과 과자를 팔았다. 다른 한 곳은 일중교 다리 옆에 있는 한옥이었다.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가 주인인 그 가게를 우리는 ‘벗거지 양반네 가게’라고 불렀다.

벗거지 양반네 가게는 박씨네 가게보다 훨씬 크고 물건도 다양해서 우리들은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안을 기웃거리곤 했다. 어느 때는 돈을 갹출하여 고무공을 사기도 했고, 놀이딱지와 눈깔사탕을 사 먹기도 하며 가게를 들락거렸다.

벗거지 양반은 어찌나 꼼꼼하게 계산을 하던지 물건을 많이 사도 깎아봤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코흘리개 동무들에게는 그 가게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 진뫼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가게. 나는 이 곳에서 버스를 타곤 했다.
ⓒ 김도수


물건을 사는 아이들에게 장난감 망원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벗거지 양반은 그 망원경을 목에 걸고 물건을 팔았다. 십 원, 이십 원 물건 사는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망원경을 보여주는 시간도 달랐다. 물건을 사고 나면 아이들 뒤에 서서 망원경을 눈에 대고 “잘 보이제” 하며 버튼을 찰칵찰칵 눌렀다. 망원경 속의 어둠에서 사진들이 찰칵찰칵 지나갔다. 한번도 보지 못한 제주도 한라산 풍경과 바다에 떠 있는 배, 폭포, 해녀들 그리고 서울의 높은 빌딩들이 즐비하게 들어 있어 아이들은 입이 딱 벌어지곤 했다.

망원경을 통해 멋진 풍경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아이들은 돈을 모아 가게를 찾곤 했다. 그런데 주인 아저씨가 물건 사는 돈이 적다며 “다음에 보여줄게” 하면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대신, 망원경을 본 친구들끼리 무슨 사진을 봤는지 물어보곤 했다.

“너, 뭣뭣 봤냐? 빌딩도 나오데? 나는 저번에 폭포까지 봤는디.” 
“해녀들도 보고 폭포도 봤는디 나도 빌딩은 못 봤어.”
“딱, 십 원어치만 보여주고 눈에서 만한경(망원경)을 떼불더랑게.”
아저씨는 “자, 여기는 서울에서 최고로 높은 빌딩이다. 무쟈게 높제. 자, 여기는 제주도 한라산이다. 참 경치가 멋지제” 하며 무슨 사진이 나오는지 척척 알아 맞추며 설명을 해 주었다.

 

▲ 중전마을 앞길에 늘어선 가게들. 내 고향 진뫼마을엔 옛날에도 지금처럼 가게가 없었다.
ⓒ 김도수


“너, 뭣뭣 봤냐? 나는 저번에 폭포까지 봤는디” 
초등학교 3학년 때, 육성회비를 못 내 담임 선생님께 불려간 적이 있다. 다음날 아침 부엌에서 일하고 계시는 어머니께 “오늘 회비 안 주먼 나 학교에 안 가 분다”며 책보를 마루에 던지고 떼를 썼다.

“저 놈이 아침부터 내 속을 뒤집어 놓네. 돈이 없는디 당장에 어디 가서 돈을 춰(빌려) 올꺼냐. 오늘만 참고 갔다 오먼 내가 구해 놓는다고 히도 저러고 고집을 부리네. 학교 안갈라먼 그 책보 이리 줘라. 부석짝(아궁이)에다 콱 집어 넣어불랑게.”

학교 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몹시 화가 나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정말 책보를 아궁이 속으로 던져 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책보를 훔쳐들고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부엌에 있는 부지깽이를 집어들고 골목까지 따라나왔다. 나는 결국 오금이네 집 대문 앞 샘터(지금은 메워지고 없다)에서 붙잡혀 엉덩이 몇 대 얻어맞고는 엉엉 울며 학교에 갔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내 손에 볏짚으로 꾸린 달걀 한 꾸러미를 쥐어주면서 중전마을 가게에 가서 팔아 모자란 돈을 채워 회비를 내라고 했다.
‘내가 이것을 어치게 팔아서 돈으로 만든다냐. 달걀은 가게에서 돈으로 잘 바꿔 주지도 않는디…’ 나는 입이 툭 튀어나온 채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집을 나섰다. 달걀을 주면서   어떻게 돈으로 달라고 할지 가게가 다가올수록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버스 정류소 옆 ‘박씨네’ 가게 앞에 발걸음이 멈춰졌다. ‘돈으로 바꿔주지 않으면 어치게 헌다냐…’ 창피한 마음에 가게 문을 얼른 열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등교시간은 점점 늦어지는데 계속 서성거릴 수만은 없어 심호흡 한 번 하고선 입술을 깨물며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 안 천장 한가운데 철사로 둥글게 엮어진 달걀 넣어두는 망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망 안에는 달걀이 가득 쌓여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뭘 살라고 왔냐?” 안방 문을 열고 나오던 가게 누나는 손에 든 달걀을 바라보았다. 목구멍이 바싹 타 들어간 나는 침을 꼴딱 한 번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육성회비 내야 헌디 울 오메가 돈이 모자란다고 요 계란 팔아서 내라고 히서….”

“시방 우리 가게에 계란이 많아서 돈으로는 안 바꿔준디. 물건으로 바꿔가먼 몰라도.”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재차 사정해 보지도 못하고 얼른 가게를 빠져 나왔다. 달걀 꾸러미를 들고 나오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 중전마을
ⓒ 김도수

돈으로 바꿀 달걀 한 꾸러미 들고 찾아갔던 ‘박씨네 가게’

벗거지 양반네 가게가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달걀 파는 걸 포기했다. 달걀을 들고 가봐야 꼽꼽하기로 소문난 그 주인 아저씨가 돈으로 바꿔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달걀 꾸러미였다. 학교에 들고 가면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될 수 있었다. 할 수 없이 박씨네 가게로 다시 들어가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찾아간다며 달걀을 맡겨두고 나왔다.

학교도 늦고 회비도 못 가지고 가게 된 나는 맥없이 비포장길에 나뒹구는 자갈만 톡톡 찼다. 화가 난 상태에서 고무신으로 자갈을 세게 찼더니 괜히 발가락만 아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군에서 제대한 뒤, 육성회비 안 준다고 어머니께 ‘띵깡’놓다 붙들려 얻어맞고 학교에 갔던 옛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부석짝에다 책보 던져 넣어 분다는 내 말에 니가 얼릉 책보 집어들고 달아난게 얼매나 이뻤는지 몰라야. 달아나는 것 보고 저 놈 새끼는 나처럼 손톱 속에 흙은 안 집어넣고 살겄다 생각혔제.”

고향집 가는 주말에 중전마을 앞을 지나노라면 그 날 아침 끝내 돈으로 바꾸지 못했던 달걀 꾸러미가 떠오른다. 그리고 또 벗거지 양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벗거지 양반의 장난감 망원경 속에서 만났던 미지의 세계가 어린 우리들의 꿈을 키워주었구나 싶어진다. 지금은 두 가게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날의 추억만은 그 자리에서 늘 새록새록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