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전라도닷컴
|
밥 한그릇을 솜이불 둘러 아랫목에 묻어 두던 어머니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꽃처럼 환하던 감나무 가지들이 어느 새 텅 비고 찬 바람 불어오는 계절이 되면 어머니는 학교 갔다 돌아오는 코흘리개 아들을 위해 스뎅(스테인리스) 밥그릇에 밥을 그득 담아 ‘복지깨’(밥그릇 뚜껑) 덮어 보관했다. 배고파 허겁지겁 달려와 밥부터 찾을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밥을 먹이려고 담요로 둘둘 말고 또 그 위에 솜이불을 덮어 식지 않도록 해 놓고 들녘으로 나갔다.
아랫목에 덮어놓은 따스한 밥을 꺼내면 어머니 가슴 속에 품은 뜨거운 자식 사랑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복지깨 중앙에는 한자로 휘갈겨 쓴 ‘복(福)’자가 새져겨 있었다. ‘내 아들 이 밥 묵고 복 많이 받거라 잉!’ 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거기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불 덮어 뜨끈한 아랫목에 보관해 두는 밥은 내 밥뿐만이 아니었다. 오일장에 나간 아버지께서 저녁 늦게 돌아오거나 외출해 식사시간에 때 맞춰 오시지 않으면 어머니는 항상 밥 한 그릇을 솜이불 둘러서 아랫목에 묻어 두었다. 아버지가 저녁 늦게 오실 적에는 형과 장난을 치다가 그만 이불 속 밥그릇을 밟는 바람에 복지깨가 벗겨져 버려 어머니께 혼이 나기도 했다.
“아이고메! 어쩐데아. 담요에 밥테기가 다 묻어 불었네. 야이 썩을 놈들아! 인자 넉 아부지 밥을 어쩔 것이여? 큰집에 가서 얼른 한 그릇 얻어다 아랫목에 또 덮어놔야 쓰겄다.” 얼큰하게 한잔 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윗목에 앉아 맛있게도 저녁을 드셨다.
 |
| ⓒ 전라도닷컴 |
조개탄 활활 타오르는 난로 위엔 고층의 ‘변또탑’ 집에서는 아랫목 담요와 솜이불이 보온밥솥 노릇을 했지만 도시락 싸가지고 가는 학교에선 찬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개탄 활활 타오르는 난로가 놓이는 한겨울에는 고층의 ‘변또탑’을 여러 개 쌓아 뜨거운 김 나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난로 위에 차곡차곡 쌓아 얹어놓은 노란 양은 ‘변또’는 수시로 위아래를 바꾸어 줘야 했다. 어쩌다 바꾸어 주지 못하는 날, 내 ‘변또’가 맨 밑바닥에 깔려있기라도 하면 밥이 타서 덕분에 고소하게 눌은 밥을 먹기도 했다.
책보를 쌀 때면 도시락 전용 보자기로 싼 ‘변또’를 교과서들 위에 얹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서 둘러메고 다닌다 해도 종종 김치 국물이 도시락 밖으로 흘러나와 교과서며 공책이며 책보까지 죄다 붉게 물들여 놓아 한동안 김치 냄새가 진동하기도 했다. 당시 노란 ‘변또’는 직사각형 모양에 높이가 좀 있었다. 아이들이 먹기에는 양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는데도 어머니들은 밥을 꾹꾹 눌러 싸주었다.
어머니는 아침밥을 차릴 때면 내게 물어 보곤 했다. “오늘 변또 싸가지고 가냐?” “응, 싸가꼬 가야 혀!” “야이 놈 새끼야! 그럼 엊저녁에 미리 말을 히주던지 그러제, 그라니도 반찬이 암(아무)것도 없고만 인자사 애기를 허먼 뭣으로 싸준다냐?” “걍 암것이나 싸줘!”
“암것이나 싸달라”고 말하는 아들이 미워 어머니는 눈을 흘기곤 했다. 사실 두메산골에서는 ‘삯꾼(놉)’을 사서 농사일 하는 날이나 돼야 오일장에 나가 반찬거리 좀 사오니 도시락 반찬으로 싸줄 만한 것이 평소에는 거의 없었다. 도시락 반찬은 대부분 김치였다. 어떤 때는 신 김치마저 없어 깨소금을 만들어 싸주기도 했다. 깨소금 반찬은 굵은 소금을 빻아 고춧가루와 참깨를 뿌려 만든 반찬이었다. 최고의 도시락 반찬은 단연 멸치볶음이었고 그 다음은 달걀찜이었다. 어머니는 늘 밀가루를 풀어 양을 늘려서 찜을 만들었다. 하지만 멸치볶음이나 달걀찜은 일 년에 몇 번 맛보기 어려운 귀한 반찬이었다.
 |
| ⓒ 전라도닷컴 |
촌스런 노란 양은 ‘변또’지만 새 ‘변또’는 내게 황홀하기만 6학년쯤 올라가자 넓이는 좀 있는데 두께가 얇아 세련돼 보이는 노란 양은 ‘변또’를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세련된 ‘변또’는 밥과 반찬을 따로따로 담아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용기였다. 하지만 그런 ‘변또’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은 한 반에 한두 명에 불과했다. 나는 한번도 반찬 그릇이 별도로 나온 ‘변또’를 들고 다닌 적이 없다. 한번은 도시락을 잃어버렸는데 아버지께 이야기하면 한바탕 집에 난리가 날까봐 말도 못하고 둥근 찬합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던 적도 있었다.
점심 때만 되면 바로 옆줄에 앉아 있는 여자 아이들이 내 둥근 찬합을 쳐다볼까봐 전전긍긍했다. 책상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지도 못하고 친구들 못 보게 무릎에 올려놓고 먹었다. 사실 나만 무릎에 올려놓고 먹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여자아이들도 나처럼 무릎에 올려놓고 먹었다. 꽁보리밥을 싸와 부끄럼 많이 타는 친구들이나 맛없는 반찬을 싸와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친구들 역시 떳떳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지 못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먹었다. 점심 때마다 찬합을 꺼내기가 부끄러웠던 나는 어머니께 도시락 좀 사달라고 떼를 썼다.
“오메! 나 도저히 챙피히서 찬합 못 갖고 댕기겄어. 아부지한테 오메가 말 좀 히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딱했는지 아버지에게 어렵게 입을 떼었다. “아, 도수가 가지고 다니는 변또가 하도 오래 되아서 한나 사줘야 헐랑가비어. 바닥이 삭아서 오돌톨톨 튀어나오고 군데군데 빵꾸가 나 불었어. 돌아온 장날 한나 사다 주제 그려.”
“시방 먼(무슨) 소리를 허는 것이여! 걍 갖고 댕기라고 혀. 우리 집에 뭔 돈이 있가디 변또를 또 새로 살라고 혀. 이녁이 돈 어디다 착착 쟁이놨으먼 한나 사다 주제 그려.” 어머니는 어려울 때 돈 만들어 쓰려고 감춰두었던 고사리 몇 근을 꺼내 아버지 손에 쥐어줬다. 고사리 몇 근 달랑달랑 들고 이웃 면에 있는 ‘가단장(갈담장)’에 간 아버지는 반찬 그릇이 별도로 있는 세련된 ‘변또’ 대신 촌스런 노란 양은 ‘변또’를 사왔다.
하지만 새 ‘변또’는 내게 황홀하기만 했다. 이제 반듯한 ‘변또’ 뚜껑으로 강냉이죽을 타 먹으니 양도 많아져 좋았다. 친구들은 조금이라도 더 타 먹으려고 울퉁불퉁한 ‘변또’ 뚜껑을 숟가락으로 두들겨 폈는데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교생에게 나눠주는 강냉이죽은 ‘변또’ 뚜껑에 조금씩 나눠 먹었다. 강냉이죽은 고학년 형들이 ‘수대’에 타서 저학년 반에 날라다 주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풍기는 고소한 냄새에 꼴딱꼴딱 침 삼키지 않는 친구들은 없었다.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스산한 날씨.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복지깨’ 덮어 묻어 두었던 어머니의 밥 냄새가 그립고, 난로 위에 차곡차곡 쌓았던 노란 양은 ‘변또’ 밥을 함께 먹었던 친구들도 보고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