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뫼마을 고향편지

“한수 양반이 우리집 밭 다 갈아주었는디…”

버들개지 2010. 11. 15. 11:39

“한수 양반이 우리집 밭 다 갈아주었는디…”
진뫼마을 이웃사촌

▲ 진뫼마을 앞 밭에서 씨앗 뿌리던 날의 한수 형님. 그 동안 골짜기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 사람들 밭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갈아준 사람이 한수 형님이다.

ⓒ 김도수

 

밭갈이 시작된 봄이다. 그런데 “우리 밭 좀 갈아줄 수 있소?”하고 이무럽게 부탁할 사람이 이제 없다. 마을에 경운기가 다섯 대나 있지만, 모두 나이가 많아 자기 일도 힘에 부쳐 어렵게 농사지으며 사는데 남의 밭 갈아줄 여력이 없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수 형님께 부탁을 했다

“어쩌겄어. 바쁘더라도 갈아줘야제. 거름이나 허처 놓고 가. 짬 내서 이번 주 안으로 갈아줄텅게.”


그렇게 늘 선선하던 한수 형님이 오토바이 사고로 당분간 경운기를 몰 수 없게 됐다.

 

“어쩌겄어. 바쁘더라도 갈아줘야제”
답답해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마을에 홀로 농사짓고 사는 어머니들 역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다. 그 동안 골짜기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밭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갈아준 사람이 한수 형님이다. 논농사는 평지에 있어 몇 집 어울려 갈아달라고 부탁하면 그래도 이웃마을 사람이 달려와 갈아준다. 하지만 어머니들 홀로 농사짓는 밭뙈기들은 제각각 외진 곳에 멀리 떨어져 있다. 일일이 찾아가 갈아주지 않으면 묵정밭이 될 처지다.


남의 어려운 사정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웃들에게 늘 베풀며 살던 한수 형님. 이젠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 몇 년 전부터는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겨우 들어가곤 했다.

“형님! 어쩌께라우. 이번에도 텃밭 좀 갈아줘야 쓰겄는디. 다 둘러봐도 형님밖에는 갈아줄 사람이 없어서 염치불구하고 또 찾아 왔고만이라우.”
“내가 시방은 눈코 뜰새 없이 바쁜디…. 다음 주에나 짬내서 한번 갈아볼텅게 그리 알아.”

늘 내 일처럼 남의 일을 도와주는 형님이 계시다는 것에 언제나 가슴 따스했다.
그런 형님이 지난해 여름, 중전마을 가게에 갔다 오다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쳤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들은 마을회관 앞 정자에 모여 간절히 기도를 했다.


“어쩌다 그릿데아. 큰일이네 큰일! 그려도 존 일 많이 헌 사람잉게 탈탈 털고 얼릉 일어설 것이고만.”

날짜가 지나도 회복 소식이 들리지 않자 마을 어머니들의 한숨 소리가 커졌다.


“어쩐데아. 참말로 큰일이네! 이 근방에서 한수 양반처럼 넘덜 일 많이 도와준 사람도 드물 것인디. 아먼, 존 일 많이 헌 사람이제. 그렁게 하느님이 도와서 꼭 일어설 것이고만.”


정자에 모여 술이라도 한잔 하는 날이면 어머니들은 앞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도 자식들도 다 떠나버린 마을에 밭을 갈아줄 사람이라곤 한수 형님밖에 없는데 그런 형님이 병원에 누워 있으니 어머니들은 돌아오는 봄이 두려웠을 것이다.

 

▲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샛거리. 이 또한 이웃사촌끼리 나누는 작은 행복이다.

ⓒ 김도수

 

“인자 우리밭은 영영 묵히불 수밖에 없겄고만…”
진뫼마을도 한 때는 한 집에 두 세대가 산 적이 있었다. 집이 없어 작은방에 세 들어 살며 자식새끼들 올망졸망 낳아 아이들 골목마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들려오던 60∼70년대가 진뫼마을 전성시대였다.


두메산골이라 논밭은 적고 사람은 많고 배고픔에 허덕이며 살던 가난했던 시절. 그 땐 집집이 일꾼도 많았다. 양식이 늘 달랑달랑하니 서로 농사일 좀 시켜달라 아우성이었다.
그 시절이 어머니들은 그리울 것이다. 산골짜기로 먼저 떠나버린 남편이 그립고 또 서러울 것이다.

“한수 양반이 우리집 밭 다 갈아주었는디… 우꿀(윗골)이고 핑밭(평밭)이고 골짜기마다 안 댕긴 데가 없이 다 갈아주었는디… 인자 우리밭은 영영 묵히불 수밖에 없겄고만… 호맹이로 파서 밭을 지어먹을 수도 없고… 인자는 포기해야 쓰겄고만….” 


한수 형님 이웃집인 현호네 집. 현호 어머니가 농사짓다 전주로 떠난 지 십오 년이 지났건만 형님은 언제나 현호네 집을 구석구석 깨끗이 돌보며 살아왔다.
현호 어머니가 떠나고 난 뒤 옆집에 불이 켜지지 않자 외롭고 쓸쓸해 현호네집 마루에 걸터앉아 떠나간 현호네 식구들 얼굴 떠올리며 그리워했다는 한수 형님. ‘진뫼마을이 그리워 못 전디고 다시 돌아와 불었다’고 현호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그래서 그 집에 다시 불 켜지기를 날마다 소원하고 살았단다.

그런 한수 형님에게 일 년 중 가장 즐겁고 행복한 날은 바로 현호네 아버지 제삿날과 설날 그리고 추석 명절. 불 켜진 이웃집 바라보면, 사람 소리 들려오는 현호네 집 담장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한수 형님은 어깨춤 덩실덩실 추며 현호네 식구들 떠날 때까지 그 집을 들락거린다.


한수 형님과 현호네 사이뿐이랴. 겨우내 마을 회관 방에서 지내는 마을사람들 모두 과일 한 알만 생겨도 한 쪽씩 나눠 먹고, 고깃국 끓이면 나간 사람들 몫 먼저 퍼 놨다가 먹이고 따순 밥 하면 꼭 함께 불러먹는다.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이나 형제들보다 날마다 얼굴 대하며 한가족처럼 지내는 마을사람들은 모두가 이웃사촌이다.

 

“형님이 얼릉 나사야 밭농사 질 것인디…”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형님은 사고가 난 지 한 달 보름 정도 지나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았고 지난해 늦가을 퇴원해 재활 치료중이다. 따스하게 햇볕 내리쬐는 날, 회관 앞에 운동 나온 형님에게 말을 건넨다.


“형님! 인자 우리밭 묵히불게 생겼소. 어치게 저 넓은 밭을 삽으로 일일이 판데아. 형님이 얼릉 나사야 밭농사 질 것인디 큰일이고만.”
“삽으로 파서라도 져묵어야제. 내 젊었을 때 같으먼 이까짓껏 한나잘이먼 다 파불어. ”


‘차마 묵히기야 허겄어’ 하는 듯 껄껄 웃는 한수 형님. 그 얼굴 오래도록 바라본다.


우꿀, 절꿀, 앞산밭, 산밭꿀, 지땅, 안터, 평밭 골짜기마다 진작 묵정밭 되어버렸을 밭뙈기들에 해마다 생기를 불어넣어 푸르게 일으켜 세운 내 이웃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