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뫼마을 고향편지

다 큰 녀석이 못줄 하나를 제대로 못 잡네

버들개지 2011. 10. 21. 11:04

 

“다 큰 녀석이 못줄 하나를 제대로 못 잡네”
진뫼마을 도수네

저 손들 있어, 허리 굽힌 노역 있어, 들녘의 모가 자란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결석을 하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에 가기 싫어 미적거리다 지각을 한 적은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추운 겨울에 몸살감기로 아파 학교에 가지 않으려다 셋째형한테 된통 혼나고선 그때야 집을 나서 지각한 적이 있다.
“그런 정신으로 학교에 다니려거든 다니지 마라. 몸살 좀 났다고 학교를 안 갈라고 혀!”  주섬주섬 책보를 싸고 있는 나를 보고 형은 책보를 빼앗으며 가지 말라 했다. 온 몸이 쑤시며 아팠지만 억지로 집을 나섰는데, 그 날 하교길에 동구 밖 몰무동에서 10원짜리 빳빳한 지폐를 줍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봐라. 학교에 안 갔으면 그 돈 니가 줍기나 했겄냐. 아프더라도 참고 가길 잘헌 거제.” 어머니는 학교 갔다 온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며 칭찬했다. 그러던 어머니지만 한 번은 “오늘 우리집에 모내기 헌께 못줄을 잡으라”며 등교를 못하게 하는 바람에 지각을 한 적이 있다. 
“오늘 얻은 놉으로는 도저히 모를 못 다 숭겄다. 니가 못줄을 좀 잡아야만 다 숭게 생겼응게 오늘은 학교에 가지 말거라. 오늘 하루만 결석허만 안 되겄냐?”고 어머니는 사정했다. 나는 결석 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며 일단 학교에 가서 조퇴를 하고 오겠다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 이름만 불러도 고추잠자리처럼 온 몸이 붉게 달아오르던 수줍고 겁 많던 성격의 소유자였던 나는 선생님께 ‘조퇴하겠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마음을 졸였다. 첫 시간이 끝나고 교무실로 향하는 선생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다. 둘째 시간엔 칠판을 쳐다봐도 모내기 하느라 뛰어다닐 어머니 얼굴만 떠올랐다. 결국 둘째 시간 수업이 끝나자 나는 용기를 내서 교무실로 가던 선생님을 뒤쫓아가 “오늘 우리집에 모내기 헌디 울 오메가 모내기헐 사람이 부족히서 선생님께 조퇴 좀 부탁헌다고 말허라고 혔는디요”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응, 얼매나 모내기 헐 사람이 없으면 어머니가 그런 부탁을 했겄냐! 알았다. 도수 너는 평소에 얌전허고 착히서 나한테 거짓말 헐 애기는 아닌게 얼릉 가서 어머니 도와주거라”고 말씀하셨다.

 

“저 새끼허고 못줄 띠었다가는 내가 나중에 욕 묵게 생겼어”
달음질쳐서 달려오느라 콧등에 땀이 배인 아들의 얼굴을 보자 어머니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뻐했다. 모내기하는 놉들은 집 앞에 있는 일곱되지기 윗논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논두렁 양쪽 가장자리에서 심은 사람들이 안쪽에서부터 논두렁 쪽으로 모를 심으며 못줄을 잡고 있었다. 그러니 모심기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아짐 한 분은 못줄을 띄우면서 그대로 심고 나머지 한 분은 내가 못줄을 잡자 모만 심게 되었다. 때마침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다 나 혼자 못줄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선 도와준다며 잡아주었다.

못줄 잡는 할아버지하고 나는 손을 맞춰 팽팽하게, 적당한 간격을 떼어가면서 못줄 막대기를 논에 꽂으며 잡고 있었다. 그런데 힘이 약한 내겐 줄이 움직이지 않도록 팽팽하게 잡고 있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또 반듯한 논이 아닌 다랭이논이라 못줄을 풀었다 당겼다 하며 잡아야 하고, 눈짐작으로 적당한 간격을 띄우며 논물 위에 못줄이 보이도록 알맞게 띄워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 애초에 그럴 실력이 안 되는 나는 못줄을 잡는 내내 할아버지께 혼날 수밖에 없었다.
 

모내기를 끝낸 진뫼마을 윗골 논들.

 

“야, 고로케 쫍게 띠야꼬 되겄냐. 쫌더 넓게 띠어! 다 큰 녀석이 못줄 하나를 제대로 못 잡네. 아, 줄 좀 팽팽하게 잡아댕겨. 힘은 어디다 쓰가디 줄이 왔다갔다 허냐. 한번 막대기를 꼽으먼 절대 흔들리먼 안 돼. 못줄 제대로 못 잡아주먼 모가 제자리에 심어지지를 안 히서 논 맬 때 애 묵어부러.”
못줄을 띄워 옮길 때마다 할아버지 고함소리가 마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이, 월국떡! 저 새끼허고 못줄 띠었다가는 내가 나중에 욕 묵게 생겼어. 논 맬 때 삐딱허게 심어져 애 묵게 생겼당게. 논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요로케 엉터리로 못줄 띠었다가는 나락 모가지 실허게 안 올라올턴디 이를 어치게 헐라요? 차라리 더디게 숭구더라도 모 숭군 사람이랑 줄 띰선 심는 것이 훨씬 낫을 것 같은디….”

막걸리와 안주를 함지박에 이고 온 어머니께 할아버지는 더 이상 나하고 못줄을 못 잡겠다고 하소연했다. 어머니는 “쫍으먼 쫍은 대로 넓으먼 넓은 대로 걍 심어붓쇼. 나락은 나온 대로 묵어야제 어찌것소. 오늘 못다 심으먼 당장 내일부터 품앗이 갚으로 나댕기야 헌디 쪄다 논 모를 논바닥에 내팽겨쳐두고 어치게 나댕기겄소. 밤중에 혼자 심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라는 말로 할아버지를 달랬다.
모내기할 때는 못줄을 잘 잡아 모내기꾼들과 손발 척척 맞추며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옆 사람과의 호흡을 맞춰가며 심는 것도 중요하다. 띄워놓은 못줄에 적당한 간격으로 둘이씩 나란히 서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심기 시작하는데 똑같이 심고 일어서는 건 불가능해 맨 나중에 심고 늦게 일어나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기계처럼 일정한 속도와 간격으로 심어지는 게 아니므로 어느 사람과 좌우 짝을 이루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논에 들어서기 전에 나는 사람들을 꼭 한번 훑어보며 들어서곤 했다. 좌우에 서 있는 분이 모내기가 좀 서툴지라도 마음이 넉넉한 사람인 게 좋았다. 그중에서도 누나들과 심는 날이 가장 편했다.
“어쩐데아. 오늘 나허고 짝을 맞춰 누나 허리 못 펴불게 생겼네.”

“다 잘 심을 수 있가디. 잘 숭군 사람 못 숭군 사람 서로 손발 맞춰감선 도우며 심어야제.”
“잘 못허다가 나 땜시 오늘 이쁜 누나 얼굴에 못줄 튕기는 건 아닌가 모르겄어.”
농담 좋아하고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 못줄을 잡는 날이면 얼른 심고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늦게 심고 일어났다가는 얼굴에 흙탕물이 튀기 일쑤여서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못줄.

“넘들은 쉬고 있는디 저그 두 사람은 언능언능 안 심고 뭐허고 있다냐! 자, 줄!” 하며 못줄을 살짝 들어 올리며 흙탕물 배인 줄을 ‘톡’ 튕겼다.
못줄 잡는 사람은 모내기꾼들의 사기도 진작시켜 가며 모내기를 진두지휘하는 총진행자 역할을 톡톡히 해야 했다. 모내기꾼들이 힘들겠다 싶으면 주인에게 술주전자 들고 모심는 논에 들어가 술 한 잔씩 돌리라고 권하기도 하고,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 만큼 남았네…’라고 노래부르며 격려하기도 했다. 

못줄 잡는 사람은 또 눈치도 있어야 했다. 모내기 할 양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해는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가 쥔 양반 애타는 마음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이대로 심었다가는 어둠이 내려 못다 심을 것 같으면 몰아치기를 해야 한다. 줄을 띄워 놓고 절반 정도 심어간다 싶으면 ‘줄, 줄! 줄이야!’ 외치며 빨리 심으라고 독촉을 해댄다. 그러면 한잔 드시고 모내기 하는 아버지들 중 꼭 한 소리 하는 사람이 있다.

“절반도 안 숭겄는디 ‘줄, 줄!’ 허고 자빠졌네. 당신이 와서 심어 봐. 허리가 끈어질라고 히서 미치겄고만 계속 재촉을 히댔쌌네. 나보다 빨리 숭굴 자신 있으먼 내가 못줄 잡을텅게 요리 들어와 심어. 나보다 모도 못 숭군 사람이 오늘따라 ‘줄, 줄’ 히댔쌌네.”
빨리 심으라고 재촉하며 못줄 잡는 이가 없으면 모내기는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모내기 하는 사람들은 ‘아, 오늘 모내기는 늦게 끝나겠구나. 논두렁에 검정고무신 벗어 놓은 거 어두워서 못 찾을랑가 모르겄네’ 하며 미리 눈에 띄는 곳에 갖다 두기도 했다.
허리 끊어지도록 하루 종일 어린모를 논에 내고 돌아서면 ‘고봉밥 밥상에 올려놓고 식구들이 오순도순 밥 먹는 모습’이 떠올라 겁나게 배가 불러왔다.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불러서 논두렁에 앉아 먹던 못밥
“요건 삼대논에 심을 못줄이고, 요건 상급배미논에 심을 못줄잉게 표시 잘 해서 두거라.”
어느 봄날 오일장에 갔다온 아버지께서 손에 쥐고 돌아와 마루에 던져놓던 못줄 두 개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흰 나일론 끈에 모를 여기다 심으라고 한 뼘 간격씩 띄워 빨간 꽃무늬 줄을 매달아 놓은 못줄. 물 대기 좋고 찰진 논이라 빨간 눈금 표시줄 간격이 긴 건 새몰마을 앞에 있는 삼대논에 심을 못줄이고, 비가 내려야 모내기할 수 있는 메마른 모래땅의 상급배미논 표시줄 간격은 좁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집 논의 척박한 정도에 따라 못줄을 사 왔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진뫼마을에도 이앙기가 들어와 손으로 모를 내는 모습은 사라졌다.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불러서 왁자지껄하게 논두렁에 앉아 못밥을 먹던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못줄을 새로 사와서 던져 놓았던 고향집 마루에 앉으니 생각이 많아진다. 진뫼마을 골짜기 골짜기 돌아다니며 한 달 내내 허리 끊어지도록 모를 심고 돌아와 온 몸에 흙탕물 배인 옷을 입고 그대로 곯아 떨어져 밤새 끙끙대며 주무시던 어머니 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못밥을 고봉으로 두 그릇씩 해치우며 일을 하던 내 젊은 날의 그을린 얼굴도 그려본다. 

먼저 심어 놓은 어린모에 연방 허리 굽혀 인사를 해대며 모를 심던 마을사람들 얼굴도 한 분 한 분 떠올려 본다. ‘줄이야!’ 외치는 소리에 일제히 한 발씩 물러나 어린모를 추려들고 다시 심으려 허리 굽혀 모내기 하던 사람들 떠나간 마을은 지금 모내기 하는 이앙기 소리만 들려오고 있다. 모내기 끝낸 논에 밤새도록 개구리 소리 들려와 ‘줄! 줄!’ 외치며 빨리 심으라고 몰아치기하던 못줄 잡는 사람 목소리 그리운 밤을 나 홀로 보내고 있다. 

 

김도수님은 광양에 거주하며 주말이면 고향인 진뫼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징글징글한 고향사랑’의 마음을 담은 산문집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를 펴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