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뫼마을 고향편지

양은밥솥 바닥이 뻥 뚫리던 그 순간…

버들개지 2011. 10. 21. 11:20

 

        양은밥솥 바닥이 뻥 뚫리던 그 순간…

         진뫼마을 도수네

 

 

다섯 개 단칸방이 줄줄이 붙어 있던 전주 금암동 자취방 시절, 우리 형제들은 두 번째 방을 얻어 살았다.
첫 번째 방은 젊은 청년이 회사에 다니며 혼자 살고 있었는데 늘 전축을 틀고 살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방은 방 다섯 개를 전세로 얻어 우리에게 다시 사글세를 내준 오씨 주인네가 살고 있었고 방과 방 사이에는 부엌이 하나 딸려 있었다. 마지막 방은 농고에 다니던 형이 누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남매가 이사간 뒤 그 방은 우리들 차지가 되었다.

마지막 방은 부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방과 방 벽 사이에 좁은 공간이 있어서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또 벽에 나무판자로 된 선반이 있어서 부엌 살림살이들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두 번째 단칸방에 살 때는 부엌이 없어서 밥 해먹는 모습을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니 창피했다. 그런데 마지막 방은 자그마한 공간이 부엌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어 너무 좋았다. 인심 좋은 사글셋방 주인집 아줌마는 월세도 올리지 않고 우리를 부엌이 달린 다섯 번째 방으로 이사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주인집 아줌마는 가난했지만 마음씨가 착한 분이셨다. 돈이 없어서 연탄을 들이지 못하고 우리 창고에 연탄 한두 장 덜렁 남아 있으면 아줌마는 “학생, 다음에 연탄 띠문 주고 우리 연탄 갖다 우선 때제 그려”라고 우리들을 늘 배려하고 도와주셨다.

 

연탄불 위 밭솥 열어보니 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느 일요일 오후, 실컷 잠을 자고 난 후 밖에 나가보니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두 형이 계속 잠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연탄화덕 한 켠에 바람구멍을 막고 있던 걸레조각을 빼내 화력을 높이고 쌀을 씻어 양은밥솥에 밥을 안쳤다. 그러고선 다시 방에 들어가 잠깐 드러누워 있는다는 게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연탄불 위에 올려놓은 밥솥이 생각났다. 재빨리 달려나가 밥솥 뚜껑을 열어보니 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솥바닥은 용광로처럼 벌겋게 달구어져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당 가운데 작두샘에서 물을 퍼 올려 벌겋게 달아오른 양은솥에 부었다. 물을 부으면 벌겋게 달아오른 솥이 금방 식을 줄 알았는데 식기는커녕 양은솥바닥이 ‘뻥’ 뚫리고 말았다. 달구어진 양은솥은 물을 붓자마자 구멍이 뻥 뚫리며 물이 조르륵 흘러내려 연탄불마저 꺼트리고 있었다. 연탄불이 꺼지며 솟구치는 분진은 작은 원자폭탄이 자취집 부엌에 투하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후회가 막심했다. 당황하지 않고 달구어진 솥을 밖으로 꺼내 천천히 식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하나뿐인 양은솥에 구멍이 뚫려 버렸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형에게 혼나지 않으려고 구멍난 솥에 조그마한 철판을 대고 가열해서 붙여볼 궁리를 했다. 솥을 다시 연탄불 위에 올려놓고 가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붙을 것 같았던 철판은 양은솥바닥에 엉겨붙지 않고 벌겋게 달구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를 어쩐다냐! 하나뿐인 양은솥이 빵꾸나 버렸으니 이젠 밥을 어디다 해먹어야 한다냐. 형들도 곧 깰 턴디….’

철판을 붙이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던 중 셋째형이 깨어나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넷째형을 깨워서 혼냈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니가 밥을 허지, 어린 것이 밥을 허게 내비두고 계속 잠을 자버렸냐”고 뭐라 했지만 셋째형도 함께 잠을 잤으므로 더 이상 나무라지는 못했다.
그 날 셋째형은 찌개를 끓여먹던 노란 냄비에 밥을 두 번씩이나 해서 저녁밥을 지었다.

 

오손도순 살다 우리들 곁을 휑하니 떠나간 셋째형
셋째형은 뻔한 살림에 자식들 가르치며 힘들게 농사짓는 부모님께 솥을 태워먹어 버렸다고 말하지 못하고 몇날 며칠 끙끙대다 남원에서 경찰 공무원을 하고 있던 큰형님 집으로 가서 자그마한 양은솥을 하나 얻어왔다.

셋째형이 양은솥을 가져오던 날, 우린 잘 퍼진 찰진 밥을 오랜만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연탄불에 냄비로 밥을 하다 보면 밑바닥의 쌀은 타고 맨 위에 있는 쌀은 잘 퍼지지 않아 생 쌀밥을 먹곤 했다. 냄비로 두 번씩이나 밥을 해야 하는 불편함도 사라져 우린 너무 행복했다. 그 동안 밥솥 대용으로 쓰던 노란 냄비에 김치찌개를 끓여먹을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다. 양은솥을 가지고 온 그 날 이후로 쌀을 안쳐 연탄불 위에 놓으면 나는 방에 들어가 드러눕는 법이 없이 솥 앞을 지키고 앉았다.

양은솥을 구해다 놓고 함께 오순도순 밥을 해먹으며 학교에 다녔던 셋째형은 1973년 여름 급작스런 병으로 그만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 진뫼마을 고향집 마당에는 양은솥이 하나 걸어져 있다. 주말이면 형제들이 모여 가끔씩 양은솥에 국을 끓여먹곤 한다. 양은솥의 국물이 펄펄 넘쳐흐를 때면 ‘빵꾸’ 나버린 양은솥때문에 순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애 태우던 어린 내 모습이 떠오른다. 오손도순 살다 우리들 곁을 휑하니 떠나간 셋째형이 보고 싶어 눈물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