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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에 모여 10원 내기 민화투를 치는 어머니들 사이에서 태금이 어머니(오른쪽)가 공책을 옆에 두고 점수를 적고 있다. 맨 왼쪽에 앉아 어머니들이 화투 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돌아가신 태금이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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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뫼마을 고향집 돌담 너머 텃밭에서 밭을 매며 벌을 키우던 태금이네 어머니가 지난 봄 돌아가셨다.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말씀도 항상 자분자분하게 하며 일도 정갈하게 하셨던 분이었는데 한 줌 재가 되어 진달래꽃 붉게 피는 강두레미산 들머리 연단이골(연이 떨어지면 닿던 골짜기) 문씨 선산이 있는 산소골로 떠나셨다.
지난 겨울 내내 마을 어르신들이 마을회관에 함께 모여 소일할 때 태금이 어머니는 몸이 아파 익산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설 연휴에 아내와 함께 병문안을 갔더니 깜짝 놀라며 반가운 마음에 일어나려 애를 쓰셨다.
“뭐더러 여그까지 왔데아. 참말로 고맙고만.”
“뭔 소리에요. 당연히 와 봐야지요. 울 아부지가 중매히서 건강히 사셔야 헐턴디 시방 병원이 뭔 말이다요?”
손을 어루만지며 말을 건네니 “병원에 입원해 봉게 진뫼회관만 계속 생각나더라고. 한평생 나랑 농사지은 마을 사람들 얼굴만 떠오르고 회관이 제일 그립도만. 어서 퇴원히서 회관에 놀러가는 게 시방 내 꿈이여!”라고 말씀하셨다.
마을 어머니들 숫자 계산 책임지던 태금이 어머니
병문안 갔다 오고 보름 뒤 고향에 가보니 퇴원해 집에 와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가서 뵈었다.
“집에 옹게 좋제라우?”
“아이고메! 날아갈 것 같이 좋제. 집에 옹게 병이 다 나사붕 것 같혀. 집 같이 핀헌 데가 이 세상 어디 있가디.”
“기운 돌아오먼 서서히 회관에 나댕기쇼. 회관에 가먼 운동도 되고 사람들도 만나고 헝게 금방 회복될 거요. 날씨도 많이 풀려서 인자 완전 봄이 되아부렀네요.”
그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우리집 돌담 너머 텃밭에 앉아 상추씨 뿌리는 모습을 곧 볼 줄 알았는데 너무도 허망하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 뒤 건강이 많이 좋아지셔서 식구들도 별로 걱정을 안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평소 모습과 달라 보이기에 태금이가 마을회관에 달려가 어머니들께 말씀드리니 모두들 달려와 온몸을 만지며 살펴보더니 “오늘 저녁 넘기기가 힘들겠다”고 하셨더란다.
어머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사랑하는 자식들을 보고 싶어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때 큰아들인 태금이는 귀에다 대고 “엄마!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고마웠어요. 내가 육형제 잘 챙기고 아우르며 살텅게 걱정 말고 맘 편히 좋은 데로 가세요”라고 말씀드렸단다. 그러자 태금이 어머니는 그만 눈을 지그시 감고 눈물 한 방울 주르륵 흘리며 환한 웃음 지으시며 숨을 거두었단다.
전주에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진뫼마을 논두렁 깡패들과 후배들이 모여 유족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사간 지 몇 십 년 만에 만난 옆집 오성이까지 마을 선후배들 빠지지 않고 와 있었다. ‘아, 진뫼마을 선후배들은 참말로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진뫼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저리 모이기 힘들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좋은 분이셨는데 이렇게 허망허게 돌아가셔 불다니…. 명절 때 인자 태금이네 형제들 어디서 모인다냐? 엄마 한 분 떠나가불먼 기둥 무너진 집허고 똑같은디. 태금이네 형제들 인자 얼굴 보기 힘들게 되어부렀고만.”
“긍게 말이여. 그란해도 쬐껀헌 마을에 또 한 집이 불 꺼져 불고. 한 분 한 분 부모님 세대들 떠나가붕게 겁나게 서운허고만. 배 곯아가며 우리들 길러 주셨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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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금이네집 장독대. 어머니는 떠나 가셨지만 아직 장독 속에는 생전에 담가둔 고추장과 장이 가득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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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선후배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 끝없는 옛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겨울철이면 회관 방에서 어머니들이 민화투 치는 모습도 떠올랐다. 십 원짜리 내기를 치거나, 저녁 당번 정하는 화투를 치면 태금이 어머니께서 공책에 이름을 적고 몇 점이 났는지 계산을 해주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마을에 안 계시니 화투 치는 모습도 보기 힘들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 마음이 아프다.
태금이 어머니는 마을 어머니들 중에 유일하게 한글을 깨치신 분이다. 내 부모님 세대에 초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마을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태금이 외할아버지께서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살게 되면서 태금이 어머니는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교육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귀국할 당시 4학년을 마쳐 일본어와 한글을 동시에 터득할 수 있었다.
태금이 어머니 택호는 ‘안터떡’이다. 또 다른 택호가 있는데 태금이 아버지께서 유난히 눈이 커서 ‘눈보떡’ 또는 태금이 아버지 성함을 따서 ‘기선이 떡’이라 불리기도 했다.
태금이 어머니는 한글을 어찌나 예쁘게 잘 쓰던지 한글을 깨우친 마을 어르신들이 그 글씨체를 보고는 “안터떡은 진뫼 골짝서 써쿠고(묵히고) 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며 칭찬이 자자했다. 또 암산 실력도 대단해 마을 어머니들 숫자를 책임지는 분이기도 했다. 어머니들끼리 돈을 빌렸다가 갚을 때 이자를 계산할 때면 으레 ‘안터떡’을 찾곤 했다.
‘호맹이 동지’ 한 분 또 떠나간 마을회관은 쓸쓸
태금이네 집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대문 입구에 담배가게 홍보용 표지판을 달고 사는, ‘가게’ 소리를 듣고 사는 집이었다. 때문에 태금이네 어머니는 청소년기에 접어든 진뫼마을 머시매들 중 누가 언제 담배를 피우는지 훤히 꿰뚫고 사는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와 자주 말씀을 나누곤 했는데 그때마다 자식들 칭찬을 해주셔서 어머니 얼굴을 활짝 펴주곤 했다.
“월국(곡)떡은 자식들이 다 착혀, 잉! 또래 아이들은 다 담배를 피운디 집이 자식들만 안 피운당게. 아직까지 담배 사로 온 적이 한 번도 없어. 어쩌먼 고로케 자식들이 다 착허게 큰 가 모르겄어.”
태금이네 어머니는 마음씨가 착할 뿐만 아니라 입도 아주 무거웠다. 두메산골에 사는 마을 청년들로선 돈을 만들어 담배를 사서 피운다는 게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너나없이 담배 외상값이 많이도 달려 있던 탓에 태금이 어머니께서는 담배를 떼 오려고 해도 돈이 부족해 늘 쪼들렸다. 그 때마다 옆집에 사는 우리 어머니께만 고민을 털어 놓으며 하소연할 뿐 다른 부모님들 귀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돈 한푼 못 버는 놈들이 벌써부터 담배나 입에 문다’며 아버지들께 혼날 게 뻔하니 숨기며 혼자 가슴앓이를 했던 것이다.
고향집을 다시 산 뒤 경운기로 고추밭을 갈거나 밤나무 밑에 자란 풀을 베려고 놉을 얻는 날이면 나는 담배를 사러 갔다. 태금이 어머니는 “그 양반은 요 담배만 피운게 요 놈 사가먼 될 것이요” 하면서 담배를 내주기도 하고, 수중에 돈이 없어 “오늘은 돈이 없응게 외상으로 헙시다. 혹시 깜박허고 안 갚을 수도 있응게 꼭 외상값 있응게 갚으시쇼, 허시오잉” 이라고 부탁하면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건네주곤 했다.
한번은 한수형님이 고추밭을 갈고 나서 수고비로 봉투에 돈을 넣어 주자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길래 대신 담배를 사다 드렸다. 그 때 돈이 없어서 외상으로 가지고 왔는데 그만 깜박하고 몇 달째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 손님이 와서 담배 한 갑 사러 갔는데 태금이 어머니는 그제서야 “지난 봄에 한수양반 담배 사준 거 아직 안줬는디…” 하며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으셨다.
내가 깜짝 놀라며 “글먼 젠작 말씀 허시제, 인자사 이야기 허요? 나 만날 때마다 돈 주라는 말 하고 싶어서 입 간질거려서 어치게 참았소? 외상은 소도 잡아묵어 분다는디 강아지만 헐 때 갚아야 허지 않겄소!”라고 너스레를 떨자 태금이 어머니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별빛 시린 밤에 일어나 마당을 가로질러 오줌 누러 갈 때면 돌담 너머 내 온몸을 따스하게 덥혀주던 태금이네집 불빛이 한없이 그리운 밤이다. 진뫼마을에 또 한 집 불빛 꺼져 쓸쓸하기만 하다.
“회관에 한 사람만 없어도 별라도 휑헌디, 안터떡이 가붕게 회관이 텅 비어분 것 같혀. 더 살다 가제 뭣이 그리 바빠서 고로케 빨리도 가부렀는가 몰라.”
한평생 농사짓고 동고동락하며 살던 ‘호맹이 동지’ 한 분 또 떠나간 마을회관은 쓸쓸하다. 회관 방에 모여 지내던 진뫼마을 인생 동행자의 신발 한 켤레가 또 사라진 것이다.
김도수님은 광양에 거주하며 주말이면 고향인 진뫼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징글징글한 고향사랑’의 마음을 담은 산문집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를 펴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