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변의 미루나무 네 그루
1986년
봄, 섬진강변의 진뫼마을 고향집이 팔린 뒤 우리 식구들은 모두 고향집을 떠났다. 강 건너 밤나무밭 아래 넷째 형이 심어 놓은 미루나무 네
그루만이 봄이면 연둣빛 새 잎 달고 떠나간 형제들을 기다렸다. 12년 동안 우리 형제들이 고향으로 언제 돌아오는지 허리 구부러지도록 바라보았으니
우리 식구나 다름없던 미루나무 네 그루.
드디어 1998년 봄, 고향집을 다시 사서 내가 주말마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건만 미루나무 세
그루는 태풍에 쓰러져 그예 일어서지 못하고 고사되고 말았다. 막둥이 나무만이 튼실하게 자라 봄이면 강변 저편에서 마을사람들을 향해 봄편지를
띄웠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막둥이 나무마저 지난 2012년 여름 태풍 ‘볼라벤’의 위세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막둥이 미루나무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우리집 식구들 모습을 얼마나 기다리고 그리워 했는지 고향집을 바라보는 자리로 쓰러졌다.
쓰러져 누운 미루나무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 놉을 얻어 몇 토막으로 잘랐다. 아래 몸통 두 토막은 ‘내 가슴 높이’로 길게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그 벌목꾼은 “그나저나 어치게 장작을 패서 땔라고 요로케 크게 썰어달라고 헝가? 포푸라는 나무만 크제 암짝에 쓸모가 없는 나무여! 그리서 요 나무는 와리바시(나무젓가락) 만드는 데나 쓰였잖어”라고 말했다.

나는 “고향집 팔고 난 뒤, 요 미루나무만 생각허먼 고향집 사서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던지 몰라요. 나무가 더 살았으먼 참 좋은디 아쉽게
쓰러져 누워 불었고만이라우. 애지중지 지켜봐온 나무라 맨 마지막 몸통은 집에다 가져다 놓을라고요”라고 답했다.
이젠 다시는 새순 내밀지
못하지만 우리집 마당에 갖다두고 오래도록 바라보며 기억하고 싶었다.
맨 아래 큰 토막은 가슴 높이쯤 크기로 두 토막을 내서 중장비를 이용해
집으로 가져왔다. 나머지 토막은 잘게 썰어 느타리버섯을 재배하기 위해 뒤란 그늘진 곳에 가져다 놓았다.
올 여름이 지나자마자 집 뒤란에
두고 느타리버섯을 재배한 나무에서는 버섯이 나기 시작해 지금 수확이 한창이다. 올 추석선물로 형제들에게 버섯을 보냈더니 넷째 형한테 전화가
왔다.
“죽어서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고 가는구나! 버섯이 먹음직스러워서 받자마자 들깨가루 넣고 고추양념 갈아넣어 당장 끓여먹고 싶지만
받자마자 차마 끓일 수가 없어 지금 한참동안 바라보다 냉동실에 넣고 있다”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에게 한없이 베풀기만 하는 미루나무를 보며 나는 그 깊은 사랑을 여전히 헤아리고 있는 중이다.

내 인생의 큰 그늘이 되어준
정자나무
고향에 가면 언제나 마을 입구에 서서 사시사철 반겨주는 정자나무 한 그루. 아이들 놀이터와 마을
어르신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온 나무다. 그래서 고향 떠나간 마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리운 고향의 상징이었고, 몇 분 살아계시는 내 부모
세대의 마을 사람들에게는 농사일에 지친 몸 쉴 수 있는 소중한 쉼터요, 마음의 안식처이다.
고향집이 팔려버린 뒤 일 년에 몇 번 고향에 갈
때마다 나는 정자나무 아래 홀로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정자나무 아래 마을의 어른아이 모두 모여들어 즐겁던 ‘아름다운 시절’을 떠 올리곤
했다.
나무 아래서 깨복쟁이 친구들과 소꿉장난을 하며 신랑신부 놀이하던 기억이며, 어른들이 시키는 씨름판에 나섰다가 후배한테 지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 한쪽 구석에 앉아 시름에 잠겼던 기억이며, 말매미 잡으려 나무에 올라갔는데 올가미에 걸린 매미가 발버둥 치며 오줌을 ‘찌익’ 싸는
바람에 아래서 주무시던 박샌 어르신 얼굴로 떨어지던 기억이며 모두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하다.
또 막아놓은 물꼬의 돌을 누가 터서 밤새도록
아래 논으로 물을 다 빼갔다며 정자나무 아래 마을 아버지들의 고함이 메아리치던 일들도 떠오른다.
“세상에! 물꼬 독을 아예 띠어 가불제
그맀데아.”
“어따, 아래 논이 다 말라강게 좀 텄제 매급시 그맀겄능가.”
“요새 새복마다 혼자 물 잘 니로게 보또랑 풀도 비고
도랑치고 허니라 땀깨나 흘리고 있고만 밤에 살째기 터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오늘 저녁에 또 물꼬독 건디맀다먼 내일 아침 난리가 날텅게
그리들 알아.”
논에 물대기 위해 밤마다 물꼬 트는 전쟁을 벌이던 아버지들.
밤새워 논물 지키기 위해 날을 새가며 풍년농사 기원하던
아버지 세대들 다 떠나간 마을 앞 논에 지금 황금빛 출렁이고 있다.
정자나무는 마을 대소사를 논하는 마을 의사당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그런 정자나무가 몇 해 동안 봄에 새순을 틔우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던 적이 있다. 애가 탔던 나는 군청 담당공무원에게 절박한 민원편지를 썼다.
그 결과 나무의 뿌리 주위를 단단히 덮고 있던 시멘트를 제거하고 영양주사도 맞히고 동공(구멍) 수술 등 종합치료를 할 수 있었다. 드디어
정자나무 잎이 새로 돋아난 것을 발견했던 그 해 봄, 나는 정자나무 아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박수를 치며 날뛰는 봄을 맞이했다.
마을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며 마을의 역사를 의연하게 지켜봐온 정자나무, 앞으로도 오래오래 무탈하고 성성하게 그 자리를 변함없이 지켜 주기를.

고향집 대대로 지켜줄 가족나무
2005년 봄, 고향집 마당 돌담 앞에 자목련 한 그루를 심었다.
두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심었다. 나무를 심은 뒤 나는 아이들에게 “이 나무는 우리 가족들이 보살피고 가꾸어 이쁘게 키울 나무다. 나무 이름은 ‘가족나무’라고 부르자!
나중에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이 나무만은 베지 말고 꼭 가꾸고 지켜주길 바란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빠가 살았던 고향집, 대대로 너희들이
지켜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당시 중1과 초등학교 6학년생이었던 딸과 아들은 “근데 고향집하고 이 나무 심는 거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라고 물었다.
“응. 너희들이 커서 취직을 하거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면 아마 이 집에 살지 않을 거 아니냐. 어느 곳에
살게 될지 모르지만 자주 찾아온다는 보장이 없잖아. 세월이 흘러 내가 떠나고 집만 덩그러니 남으면 금방 무너져 내릴 거다. 세월이 흘러 엄마아빠
안 계셔 보고 싶고 그리울 때 가족나무라도 보러 너희들이 고향집에 자주 찾아와주길 바란다.”
아비의 욕심은 그런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진뫼마을 집에 자주 찾아와 추억들 쌓였으니 자식들도 가끔은 이 집이 생각나겠지. 봄이면 자목련 꽃은 예쁘게 피었을까, 가족나무는 얼마나 컸을까
궁금하고 그립겠지.’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결혼해 손자들과 함께 고향집 마당 가족나무 아래 함께 서는 꿈을 꿔본다. ‘가족나무’가 고향집을
일깨워주는 나무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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