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뫼마을 고향편지

그 논 밭의 흙 한 톨

버들개지 2013. 4. 25. 10:15

 

쌀밥 한 그릇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 고향 진뫼마을 역시 섬진강변 좁은 골짜기에 논밭은 한정되어 있어 평생 흙과 나뒹굴며 살았던 어른들도 땅 한 평 갖기가 너무 힘들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후반, 가뭄이 들어 모내기를 하지 못해 마을 사람들은 조를 심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세 끼 모두 노란 조밥이 밥상에 올라왔다. 나는 끼니때마다 밥상 앞에서 어머니께 ‘띵깡(떼)’을 부리곤 했다.

 

“오메! 서숙(조)밥은 인자 묵기 싫어. 입안이 꺼끄라와 못 묵것어. 보리밥 좀 줘!”
“아부지처럼 물에 말아서 걍 훌훌 떠 닝기부러! 요 서숙이라도 묵는 걸 복으로 알고 언능 묵어라.”
돌이켜보면, 참으로 철 없던 투정이었다.

 

우리 식구들을 먹이고 키워주었던 논밭다랑이 이름들을 잊지 않고 불러주고 자식들에게도 물려주고 싶다. 그래서 경지정리 하기 전 논다랑이 옛 모습이 그대로 있는 지적도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흙탕물 튕기며 나뒹굴던 논
마을 앞에 있어 가깝고 물대기 좋아 못자리를 하던 일곱되지기 못자리배미 논. 쌀 독아지가 텅 비도록 곡식을 팔아 굶주림 견디며 돈을 만들고 모자란 돈은 외갓집에서 빌려다 샀다는 도롱고테 논. 비가 온 뒤 한두 시간 지나면 물이 빠지는 모래땅이라 모내기 하는 날이면 흙이 굳어버려 생땅을 파서 모를 심느라 손가락이 퉁퉁 부었던 상급배미 논. 집안 시제를 모시고 벌초를 하며 지어먹었던 새몰 정자나무 아래에 있는 시제답, 용쏘강변 옆에 논물 대기 좋아 삼대논까지 못자리를 해서 모내기하던 두 다랑이로 된 용쏘배미 논….

 

부모님과 형제들이 흙탕물 튕기며 함께 나뒹굴던 논들은 이제 모두 경지정리로 인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집 앞에 있는 일곱되지기 논만이 두 다랑이가 한 다랑이로 합쳐진 채 남아 있다.
일곱되지기 논은 다행히 남아 있어 내 발길을 자주 붙든다. 모를 찌다 다리가 띠앗거려 쳐다보면 거머리가 붙어 있어 후다닥 논두렁에 올라 거머리를 떼어내며 아까운 피를 질질 흘리던 곳. 둥근 소쿠리에 새참을 이고서 흔들리지 않도록 한 손은 소쿠리 옆에 대고, 또 한 손은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논두렁에 들어서며 샛거리 먹자고 외치던 어머니 목소리 떠오르는 그 논두렁을 되찾기 위해 지금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일곱되지기 논은 제가 꼭 살랑게 팔라먼 저한티 팔아야 헙니다. 그 논을 사서 흙 밟고 농사짓는 게 제 소원이거든요!”
일곱되지기 논 임자한테도 그렇게 신신당부해 놓은 터다.
우리 식구들을 먹이고 키워주었던 논밭다랑이 흙들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 논밭다랑이 이름들을 잊지 않고 불러주고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물려주고 싶다. 그래서 경지정리 하기 전 논다랑이 옛 모습이 그대로 있는 지적도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흙도 숨을 쉬고 살아야 헌디…”
부모님 앞으로 등기이전이 하나도 안 되어 있던 밭들의 이름도 나지막이 불러본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고추밭. 안터에 있는 텃밭과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개간해 나눠짓던 개간 밭. 개간 밭 맨 위쪽에 있던 작은 두 다랑이 콩밭. 큰집 두만이 형님이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경작해 먹으라고 임대해준 밭, 벌초를 해주며 지어먹던 평밭에 있던 두 다랑이 밭. 오르막길인 마을 뒷산 너머에 있어 거름 나르기가 제일 힘겨웠던 산밭굴 밭. 개간할 수 없을 정도로 경사가 심해 밤과 감나무를 심어 가꾼 징검다리 위쪽의 밤나무 밭….

 

안터 텃밭과 고추밭 빼고는 모두가 남의 땅이다.
“흙은 거짓말허는 법이 없응게 돈 모으먼 모다덜 전답에 투자해라!”
취직한 형님들에게 늘 그렇게 당부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이제 부모님이 짓던 논밭은 거의 다 남의 손에 넘어가고 없지만 고추밭과 안터밭 만큼은 대대로 물려주고 싶다. 그 흙들은 우리 식구들을 먹여살린 생명의 근원이지 않겠는가.

 

셋째형이 죽고 난 그 해 여름, 김장용 무와 배추를 갈기 위해 부모님과 나는 아침 일찍 삽과 괭이를 둘러메고 안터밭으로 갔다. 아버지는 ‘난닝구’까지 벗고는 흙을 파기 시작했다. 괭이로 팍팍한 땅을 파던 아버지와 그 뒤를 따라 풀을 매며 이랑을 만들던 어머니. 자식 잃은 한을 땅을 찍어대며 달래던 부모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나는 그 밭을 쉬이 남에게 넘길 수 없다.

 

집 앞에 있는 고추밭은 등기이전이 안돼 있어 몇 해 전 두 번씩이나 돈을 주고 사야만 했다. 120평정도 되는 밭인데 몇 년 전 풀과의 전쟁에서 두 손 든 나는 그 밭의 절반에 조경용 나무를 심고 나머지만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주말 농사를 짓다보니 절반도 힘들어 상추와 고추 심은 곳을 뺀 나머지 땅은 풀이 나지 않도록 두꺼운 비닐로 덮어버렸다. 그랬더니 마을 사람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나를 나무랐다.

“흙도 숨을 쉬고 살아야 헌디 고로케 다 덮어놔불먼 어치게 헌당가?”
“아이고메! 풀 땜시 도저히 농사 못 지어 묵겄어라우. 풀을 매고 뒤돌아서먼 또다시 나붕게 어치게 히보덜 못허겄어라우.”

 

“그리도 그렇게 흙을 함부로 덮어분 거 아니다네. 흙도 햇빛을 보고 비도 맞음선 숨을 쉬어야 살아있는 땅이 돼서 담에 농사가 더 잘되는 법이다네.”
아무리 풀이 귀찮다손 하늘을 가려버리는 행위는 흙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농부의 자세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은 ‘어떻게 땅을 놀릴 수 있겠느냐’는 안타까움으로도 느껴져 나는 다시 비닐을 걷어내고 강낭콩을 심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눠먹었다.

 

 

신발 속 흙들을 밭에다 꼭 털고
주말에 고추밭에서 일하고 나올 때면 나는 꼭 신발 속 흙들을 밭에다 탈탈 털고 나온다. 채소를 거둬 다듬을 때도 뿌리에 딸려 나온 흙들을 반드시 밭으로 다시 던져 놓는다. 경운기로 밭을 갈거나 폭우가 쏟아져 낮은 밭두렁으로 흘러 넘쳐 수렁에 흘러나온 흙을 보더라도 꼭 밭으로 던진다.
그런 모습들을 보곤 마을 사람들은 “저그 부모님이 만지던 흙을 도수는 한 주먹도 버리는 일이 없구만”이라고 흐뭇하게 말씀하신다.

 

부모님은 몽글고 찰진 흙을 만드느라 발바닥 뜨겁게 수많은 자갈들을 주워내고 땀 흘리며 거름을 내서 옥전옥답을 만들지 않았던가. 그러니 어찌 내가 그 논밭의 흙들을 함부로 버릴 수가 있겠는가. 부모님에게 ‘흙은 곧 생명’이었던 것을.

 


김도수님은 광양에 거주하며 주말이면 고향인 임실 진뫼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징글징글한 고향사랑?의 마음을 담은 산문집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를 펴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