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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철 돌아오는 봄이면 허리 굽혀 퍼낼 정도로 쌀은 줄어들어 있었고 여름철이면 보리쌀에 한 주먹씩 놓아먹던 쌀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러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다 보니 쌀을 퍼내 돈을 만들다 보니 먹을 쌀이 늘 부족했다.
누이 친구들은 손수건에 쌀을 싸 가지고 다녔다. 누이는 그게 부러워 드럼통 속 든 쌀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워낙 밑바닥에 깔려있는데 퍼 올릴 수가 없었다.
누이는 쌀을 얻어먹고 싶어 바짝 다가가 “나 쌀 좀 줄래?”하고 손 벌리면 조금씩 집어주었다. 구멍가게도 없는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일년 지내야 겨우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과자나 사탕 맛 몇 번 볼 수 있으니 아이들은 어머니 몰래 쌀을 간식처럼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늘 깐깐했다. 꼭 사야 할 교과서나 공책 등도 제 때 기분 좋게 사 주는 법이 없었다. 한바탕 속이 부글부글 끓게 하고 나서야 돈을 주거나, 돈 나올 구멍이 없으면 “학교 그만 다니고 지게나 맞춰서 나랑 일이나 하자”고 화를 내곤 했다. 돈이 없으니 속상해서 그랬겠지만 어린 자식들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벼를 수확하면 올해는 몇 가마니를 매상하고 아버지 몰래 얼마나 쌀을 퍼낼 할 것인가 계산하고 있었다. 오늘날 젊은 부모들처럼 자식 한두 명 낳아 길렀다면 조금은 덜 고생했을 텐데 줄줄이 낳은 자식들 계속해서 손 벌리다 보니 줄 돈도 돈 나올 구멍도 없고 하니 돈 이야기만 나오면 아버지는 답답해 화를 냈던 것이다. 학부형이 된 지금에 와서 아버지 입장으로 돌아가 보니 돈이 없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으면 귀여운 자식들 손 벌리는데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랬을까 마음 한켠이 늘 아려온다.
깐깐한 아버지 성격을 잘 아는 마을 어머니들은 협조를 잘 해주었다. 그러나 매상을 하러 가는 사람은 아버지들이었으므로 미리 협조를 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들은 매상이 끝나면 남몰래 슬쩍 어머니 손에 돈을 쥐어 쥐곤 했다.
아버지는 말려서 차곡차곡 쟁여놓은 벼 가마니 숫자를 몇 번씩 세어보았다. 아무리 말라서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벼 가마니 숫자가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허네. 나락 가마니가 그렇게나 줄어들 수가 있데아. 올해 나락이 제법 실허게 잘 되았는디 말려봉게 영 형편이 없네. 인자 애새끼들 갈칠라먼 뭣으로 돈 만들어 뒤똥구녘 댄다냐. 일찍 자파(포기)허고 집이서 나랑 농사나 지어야 서로 신간(속) 편허제.”
중전마을에서 쌀을 내려 해도 사갈 사람이 없어서 늘 걱정이었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가게만 운영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소문 했다가 쌀을 내곤 했다. 중전마을 옆 일중리는 문종이를 주업으로 생활하며 사는 사람들이 몇 가구 있어 쌀을 사고 파는 구멍가게가 있었지만 사들이는 양이 한계가 있어 아무 때나 사들이지는 않았다.
매상을 하고 식구들 먹을 쌀만 겨우 남겨둔 드럼통에 넣어둔 쌀 역시 온전히 남아나질 않았다. 도시에 나가 자취하며 학교에 다니는 자식들, 휴일 날이면 돌아와 계속해서 손 벌리니 어쩌지 못해 드럼통 속에 든 쌀까지 손대야 했다. 쌀 떨어지면 꽁보리밥 먹으면 되니 계속 퍼냈던 것이다.
“자네들 갈침선 자네 어메 나한테 쌀 무던히 냈제. 아부지한테 돈 달라고 허먼 집에 기함(고함)소리가 낭게 그냥 조용히 자식들 손에 돈 쥐어줄라고 아부지 몰래 쌀을 퍼냈제. 쌀뿐만이 아녀. 장에 가먼 콩이랑 팥, 깨 하여간 돈 되는 것이라먼 죄다 가지고 와서 나보로 팔아달라고 히서 내가 심부름께나 힜제.”
소지당숙모님은 논밭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린 자식들은 쑥쑥 자라나 양식 대기도 빠듯해 생활하기가 힘들어지자 쌀을 소매로 사서 오일장에 내다 팔아 어려운 가정경제를 극복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숙모님도 5~6년 정도 하다가 그만 두는 바람에 쌀 내는 일이 다시 힘들어졌다.
“점순이네 어메! 다무락(돌담)에다 쌀 올려놨어. 얼릉 갖다 놔.”
쌀 자루 이고 가는 것을 혹시 마을 사람들이 보면 아버지께 말이 들어갈 염려가 있으니 어머니는 남 몰래 쌀을 퍼냈던 것이다. 쌀을 퍼내며 “너그들 내가 딜꼰(데리고 온) 자식도 아닌디 넉 아부지 몰래 쌀이나 퍼내고 시방 내가 뭐더는 짓인가 모르겄다”며 한숨짓곤 했다.
주말에 점순이네 어머니랑 모정에 앉아 “나 학교 다닐 때 울 오메(우리 어머니) 돈 취러(빌리러)가먼 금방 쓸 돈인디 춰(빌려) 주고 그랬제라우”하고 고마웠던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 쌀 퍼냈던 이야기를 꺼낸다.
경운기에 벼 가마니 싣고서 쌀 방아 찧으러 가 어머니 쌀 퍼내던 모습을 늘 지켜보던 송기형님. 내가 산문 집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란 책을 펴내자 형님이 모두 읽어 보고는 “도수야, 다 잘 썼는디 빠진 게 하나 있더라. 넉 어메가 넉 아부지 몰래 쌀 무던히도 퍼 냈는디 그 이야기가 빠져부렀더라. 내가 경운기 몰코 쌀 방에(방아) 찧로 가먼 미리 이야기를 혀. ‘적아부지(남편) 몰래 오늘 쌀 좀 퍼낼랑게 절대로 이야기 허지 맛쇼.’ 글먼 내가 ‘오늘은 또 얼매나 퍼낼라요?’ 껄껄 웃제. 그렇게 쌀을 돌라 묵어도 꼽꼽한 자네 아부지가 그걸 전혀 모른단 말여.”
형님은 중장비 운전으로 사우디 가서 고생해 벌어 온 돈으로 논을 개간했다. 진뫼마을 강가를 십여 분 거슬러 올라가면 ‘구장네 솔밭’이 나오는데 그 넓은 강변 땅을 개간해서 벼 농사 지으며 살았다. 그러나 논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었을 뿐 투자한 돈에 비해 건질 것 없는 늘 빈 껍데기뿐인 농사일에 치여 살았다.
농사가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던 형님은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살려고 땅을 개간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 피땀 흘려 고생해 벌어온 돈, 도시에 나가 땅을 사지 뭐하게 고생해 가며 개간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형님은 평생 고향 땅을 만지며 살았다.
도시에 나가 땅을 샀더라면 아마 형님은 큰 부자가 되어 얼굴 번질번질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구릿빛 얼굴로 평생 고향 땅 만지며 살던 형님은 황금 빛으로 물든 벼들을 수확하지도 못한 채 올 추석 다음날 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형님께서 마을 이장을 볼 때 나와 함께 사라진 징검다리를 복원하고 허락바위를 되찾아와 행복에 젖어 웃음짓던 그 때가 벌써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맑고 푸른 가을 하늘에 개간한 논에서 황금 빛 벼들이 너울너울 춤추는데 형님은 떠나고 안 계셔 올 가을이 유난히 쓸쓸하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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