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뫼마을 고향편지

보물 찾았더니 '엉덩이로 이름 쓰라네'

버들개지 2006. 4. 26. 23:02
 

삼천리 금수강산에 꽃피는 봄이다. 남녘부터 올라온 꽃 사태가 두메산골 진뫼마을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한바탕 꽃시위를 벌이고 있다. 서울로 이사간 향자 조카네 집 무너진 돌담 옆에 서있는 매화꽃이 맨 먼저 꽃 시위를 벌이더니 현호네 집 뒤란에 있는 산수유꽃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곧 이어 개복숭아꽃, 산벚꽃 이산 저산에 터지며 마을은 온통 꽃대궐 속이다.

 

▲ 벚꽃 만발한 덕치초등학교. 벚꽃 피는 날짜에 맞춰 꼭 소풍 날을 잡았다.
ⓒ 김도수

마을은 온통 꽃대궐 속

내가 다녔던 덕치초등학교 울타리는 일제강점기 때 심었다는 벚꽃나무가 빙 둘러 자라고 있다. 이젠 고목이 되었지만 지금도 봄이면 웨딩드레스 입은 5월의 신부처럼 언제나 눈부시게 피어난다. 학교에선 벚꽃이 만개할 때 꼭 봄 소풍을 갔다. 그래서 가지마다 꽃망울 맺기 시작하면 우린 소풍 간다는 설렘에 꽃망울 터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소풍 가는 날이면 도시락 싸 들고 개미떼처럼 길게 줄지어 서서 이산 저산에 핀 꽃들을 구경하며 목적지까지 계속 재잘거리며 갔다. 요즘은 학교 인근 유원지로 길게 줄지어 소풍 가는 모습도 구경하기 힘들다. 대부분 버스를 대절해서 수학여행 가는 것처럼 소풍을 가기도 한다.

 

소풍 가는 날 아침이면 부모님은 ‘용돈’을 주었다. 일년 내내 돈맛을 볼 수 없었는데 동전이나 빳빳한 10원짜리 지폐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용돈이란 단어는 평소 입 밖에 낼 일이 없었는데 소풍 날 아침이면 흥얼거릴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부모님은 “아나, 가다가 사탕이나 사 묵으라”며 빳빳한 10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어주면 너무 행복했다.

 

▲ 쌍벚나무. 가을 운동회 날 아침이면 어머니는 '일 좀 더 하고 점심 때 갈테니 쌍벚나무 아래
서 만나자'고 약속 했다.
ⓒ 김도수

소풍 간다는 설렘에 꽃망울 터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어머니께서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한 도시락을 받아 들면 무슨 반찬이 들어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멸치 볶음에 김치를 싸주었을까? 아님 밀가루 섞어 찐 개란을 싸주었을까? 어머니가 건네주는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받아 들면 무슨 반찬이 들어있는지 무척 궁금해 노란 ‘변또’ 뚜껑을 얼른 열어보고 싶었다.

 

콧노래 부르며 강변 길을 걷다가 가끔씩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면 빳빳한 돈이 바스락거렸다. 이 돈으로 무엇을 사먹을까. 오늘 다 까먹고 와버릴까. 아님 조금 남겨 올까. 아니면 아무것도 안 사먹고 그냥 어머니 손에 다시 쥐어줄까. 머리 속은 온통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 혼란스러웠지만 입안에는 벌써 눈깔사탕이 들어와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돈 맛. 그리고 일년 내내 몇 번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반찬과 하얀 쌀밥을 싸 들고 가는 소풍 날 아침이 너무도 좋았다. 봄 처녀 가슴 울렁이는 봄물이 코흘리개 어린아이의 가슴에도 날아들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 집으로 하교하는 후배들.(중전마을)
ⓒ 김도수

오랜만에 맛보는 돈 맛

교문 앞 구멍가게에 다다랐다. 오랜만에 호주머니에 든 돈을 만지작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친구들 틈에 끼어 뭘 사 먹을까 고민하다가 친구들이 유리병 속에 담긴 하얀 눈깔 사탕을 한 개씩 입에 넣으면 나도 넣었다. 다디단 사탕을 입에 넣고 교문 양쪽에 활짝 핀 벚꽃 사이로 걸어가면 그 얼마나 행복했던가.

 

오랜만에 혀끝에서 전해오는 다디단 눈깔사탕을 입 속에 오래도록 넣어두기 위해 볼 양쪽으로 움직이지 않고 한쪽 볼에 고정시켰다. 톡 튀어나온 볼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는 즐거움과 침이 고여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갈 때의 만족감은 소풍 날 내게 주어진 최고의 기분이었다.

 

친구들은 소풍 날 아침이면 대부분 ‘껌’을 사서 씹었다. 지금처럼 한 통씩 묶음으로만 파는 게 아니라 낱개로도 팔았다. 한 개에 2,3원씩 했는데 한 통씩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낱개로 사서 씹었다.

 

교실에 들어서면 친구들은 오늘은 소풍 가는 날 이라듯 기분 좀 낸다고 ‘짝짝’ 소리를 내며 ‘껌 씹는 것’ 자체를 자랑하며 씹었다. ‘애들아! 나 오늘 껌 좀 씹고 있으니 봐달라’ 는 듯 풍선을 크게 불어대고 있었다. 껌을 맛있게 씹으며 풍선을 불어대는 친구들을 바라보니 입안에 들어있던 눈깔사탕이 곧 사라질 거라는 생각에 나도 차라리 오래도록 씹는 껌이나 사먹을걸 후회하기도 했다.

 

▲ 눈깔사탕 사 먹던 교문 앞 구멍가게 자리. 지금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 김도수

다디단 사탕을 입에 넣고

어쩌다 학용품 사고 남은 돈으로 껌을 하나씩 사서 씹을 때도 있었다. 지금처럼 단물 빠지면 바로 버리는 게 아니라 최소한 일주일씩은 기본으로 씹으며 기둥에 붙여 놓고 계속 씹었다. 그 땐 껌을 얼마나 씹어보고 싶었던지 밀이 익어갈 때면 껌을 만들어 오래도록 씹고 다니기도 했다.

 

98년 봄, 고향 집을 사서 기둥에 물걸레질하며 닦는데 어린 시절 껌 붙인 자국들이 선연히 나타났다. 유명 제조회사 껌들은 며칠씩 씹어도 껌 양이 항상 그대로여서 오래도록 기둥에 붙여두고 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름없는 제조회사 껌들은 값싼 대신 딱딱하기도 하고 씹으면 씹을수록 양이 줄어들어 오래도록 씹을 수 없었다.

 

‘땡땡 땡’ 집합 종소리에 학년 별로 줄지어 서서 교장선생님의 ‘봄 소품’ 일장연설을 듣고 있으면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날리며 운동장에 꽃 수를 놓고 있었다. 몇 분의 여선생님들은 봄내음 물씬 풍기는 옷차림에 멋진 모자까지 눌러쓰고 벚꽃처럼 화사하게 단장 하고 서 계셨다.

 

3,4학년 때던가. 한번은 진뫼마을 남쪽 저리소산 아래 ‘얼음바위’로 봄 소품을 간 적이 있다. 하루 종일 햇볕 들지 않고 응달 진 곳이라 한번 눈이 내렸다 하면 겨우내 얼음장을 뒤집어 쓰고 있다 하여 얼음바위라 부른다.

 

4~6학년들만 얼음바위로 갔다. 반별로 줄지어 서서 교문을 빠져 나와 중전마을로 접어드는데 버스 정류장 앞에서 셋째 형을 만났다. 형은 도로변에 서서 내가 어디쯤 오는지 애들에게 몇 번씩 물어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형은 나를 보자 반가워 얼른 가게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사이다 두 병을 사주었다. 형은 “한 병은 니 친구들과 나눠 마시고, 한 병은 너 혼자 먹어라”며 사주었다.

 

▲ 뛰엄바위(왼쪽), 도로가 나면서 사라진 얼음바위
ⓒ 김도수

“한 병은 니 친구들과 나눠 마시고, 한 병은 너 혼자 먹어라”

형은 돈이 없으면서도 동생이 소풍 가는 모습을 보고 ‘사이다’를 사주었던 것이다. 한번도 사이다 맛을 보지 못한 나는 병아리 눈물만큼씩 아껴가며 마셨다. 평소 친구들과 눈깔사탕 하나 나눠 먹을 기회가 없었던 나는 사이다 한 병을 친한 친구들에게 건네주며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얼음바위는 강 건너 ‘뛰엄바위’와 엇비슷하게 강 양쪽에 쌍벽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얼음바위나 뛰엄바위 모두다 진뫼마을 사람들에게는 사랑 받은 바위다. 얼음바위는 급경사가 심하고 장소가 비좁아 반별로 강변 곳곳에 흩어져 자리를 잡고 놀았다. 지금은 넓은 도로를 내면서 얼음바위는 폭파되어 사라졌지만 아직도 강변 아래쪽으로는 얼음바위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며 내 뻗어 있다.

 

기다리던 점심시간.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열어보니 일년 내내 몇 번 맛 볼 수 없는 멸치볶음과 개란탕이 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입에 짝짝 달라붙은 하얀 쌀밥에 맛있는 반찬까지 점심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도시락이 날마다 소풍 날 같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저녁 밥을 생각해서 반찬을 조금 남겨 가지고 갔다가 저녁식탁에 올려 놓고 먹기도 했다.

 

▲ 진뫼마을 앞산에도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 김도수

날마다 소풍 날 같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마지막 행사로 보물 찾는 시간. “자, 지금부터 보물 찾는 시간이다. 이쪽 바위에서부터 저 쪽 나무 사이에 보물종이가 숨겨져 있는데 찾는 시간 20분이다. 알았지?” 선생님 말씀이 끝나자마자 우린 우르르 몰려가 보물을 찾았다. 보물종이는 반별 또는 단체로 즐겁게 노는 틈을 타 선생님 몇 분이 우리 몰래 돌 틈이나 풀숲, 또는 나무껍질 속에 숨겨놓았다.

 

소풍 때마다 한번도 찾지 못한 보물을 바위 틈에서 찾아냈다. 기분이 너무 좋아 하늘을 날듯 기뻤다. 그런데 보물 종이에는 ‘공책 한 권’, ‘엉덩이로 자기 이름 쓰기’가 적혀 있었다. 난감했다. 공책 한 권, 아니면 연필 한 개가 적혀 있으면 좋으련만 아이들 앞에서 엉덩이로 이름을 쓰라니. 보물을 찾는 순간 너무도 기뻤는데 단서조항을 읽자 나는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엉덩이로 이름을 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공책 한 권’이 물 건너 가버렸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성격도 많이 변해 지금은 매우 쾌활한 편이지만 어린 시절 나는 매우 내성적이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내 이름을 호명하며 책을 읽어보라고 하거나 질문에 대답해보라고 하면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음성은 떨려 모깃소리처럼 기어들어갔다.

 

 

‘공책 한 권’, ‘엉덩이로 자기 이름 쓰기’
금요일 오후면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4학년 때부터 개인별 특기활동을 살릴 수 있도록 일주일에 한번씩 ‘특별활동’ 시간이 주어졌는데 내 뜻과는 상관없이 연극 반으로 편성되어 버렸다. 특별활동부 인원은 학급별로 할당된 인원을 모두 채워야 했는데 급우들이 연극 반에 서로 들어가지 않으려 하자 선생님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를 연극 반으로 편성시켜 버렸다.

 

연극 반은 내성적인 내 성격을 개조하는데 최고였다. 하지만 남들 앞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연기를 해야 했으니 특별활동 시간이 얼마나 끔찍했겠는가.

 

금요일 아침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학교 가기가 싫었다. 성격이 쾌활했다면 담임 선생님께 ‘연극 반은 내 적성에 맞지 않으니 다른 활동 부로 바꿔달라’고 면담을 하면 될텐데 혼자끙끙 앓고 괴로워했다. 연극 반에 편성된 특별활동 시간이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웠던지 지금도 기억하기 싫다.

 

나뿐만 아니라 보물을 찾아온 아이들 대부분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보물종이에 상품명과 단서조항이 모두 적혔기 때문이다. 나처럼 엉덩이로 이름을 쓰란다던가, 아니면 노래를 부르라던가, 아니면 장기자랑을 하나씩 해보라는 것이었다. ‘보물을 찾았으니 걍(그냥) 상품을 나눠주면 될 일을 갖고 뭐더게 노래를 불러라, 엉덩이로 이름을 써봐라 괴롭히는지 모르겄네. 전에는 상품을 걍 나눠주덩만 맥 없이 보물을 찾았는가 벼(봐).’

 

▲ 회문산 깃대봉 능선에서 바라본 덕치초등학교와 인근마을. 산 아래 학교 운동장이 보이고
학교 앞 강 건너 마을이 물우리. 그리고 오른쪽 마을이 새몰이고 강 끝줄기 맨 마지막 마을이
진뫼다.
ⓒ 김도수

맥 없이 보물을 찾았는가 벼
선생님은 보물 찾는 아이들을 급우들 앞에 모두 앉혀놓고 한 명씩 불러내 보물종이에 적혀진 단서조항을 읽으며 어서 해보라고 했다. 보물종이에 적혀진 대로 하지 않으면 선생님은 선물을 주지 않았고 제자리로 들어가 앉으라고 했다.

 

내 차례가 돌아왔다. 선생님은 “엉덩이로 이름을 쓰면 노트를 주고 앞에 나온 친구들처럼 안 하면 상품은 없다”고 했다. 창피해 몸을 요리조리 비틀며 서있다가 무슨 용기가 났던지 얼굴을 하늘로 쳐들며 엉덩이로 이름을 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대단한 행동이었다. 선생님은 “엉덩이를 크게 흔들며 이름을 쓰지 어영부영 흔들고 마냐? 일단 시늉은 냈으니 준다” 며 상품으로 노트 한 권을 줬다.

 

기분 좋게 노트를 받아 들고 한 손엔 아직도 형이 사준 사이다 병을 들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그 날 저리소산 가는 길목에 있는 ‘상급배미’ 논에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홀로 보리 밭을 매고 계셨다. 어머니께 달려가 한 모금 남은 사이다를 얼른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반별로 줄지어 서서 귀가 하는 대열에서 나는 이탈할 수 없었다.

 

마을 앞 정자나무쯤 이르자 담임 선생님은 “진뫼마을에 사는 아이들, 모두 앞으로 나와!” 하더니 여기서 인사하고 가란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상급배미 논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내가 들고 있는 사이다 병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며 “니가 뭔 돈으로 요런걸 다 사먹었냐? 아침에 내가 준 돈으로는 택도 없을 것인디….” 

▲ 소풍간다는 설렘에 꽃망울 터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 김도수

▲ 교문 앞 양쪽에 서 있는 벚나무에 화려하게 피었던 끛들은 다 지고 대신 잎들이 활짝 피었다.
ⓒ 김도수

“진뫼마을에 사는 아이들, 모두 앞으로 나와!”  

“성(형)을 중전 차부(버스 정류장)에서 만났어. 친구들이랑 함께 묵으라고 사이다를 두 병이나 사 주었는디 한 병은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고 힜고 한 병은 나만 묵어라고 힜어. 근디 덜 묵고 쬐께 냉기왔어.” 어머니는 김 나간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며 “사까리(사카린) 물 보다는 덜 달아도 달짝찌근험선 써빠닥이 약간 ‘쐐~에’ 허니 참 마싯다” 며 입을 쩍쩍 다시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이다를 셋째 형이 사주고 갔다는 말에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돈 가질러 왔길래 이 집 저집 다 돌아댕김선 취러 댕깄는디 마을에 돈이 완전히 말라부렀더라. 포도시 차비정도만 줘서 올려보냈는디 너한테 사이다를 다 사주고 갔구나. 객지에서 자취하며 공부하는 자식들이 집에 오먼 돈을 좀 넉넉히 줘서 보내야 헌디 걍 보내놓고 난게 어찌나 맘이 짠하고 애리던지 아직도 너그 성이 눈에 볼(밟)핀다. 그 놈의 돈은 조선팔도 어디로 다 궁구러 댕기가디 마을에 한 푼도 없다냐?”

 

어머니는 형이 사준 사이다 병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손가락만하게 올라온 보리들, 어서어서 쑥쑥 자라 돈 만드는 그날이 빨리 다가오길 바라며 어머니는 다시 호미자루를 잡고 있었다.

 

지금 진뫼마을에는 늙으신 부모님들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이젠 한집도 보리를 파종하는 집이 없다. 봄이면 마을 앞 논밭들 초록 꽃으로 피어나 푸른 초원을 자랑했는데 그 모습 온데간데없고 앞 뒷산과 남쪽 저리소산에 핀 산벚꽃과 개복숭아꽃들만 피어 꽃 대궐 이루고 있다.

 

꽃피는 봄이면 뒷산에 해지는 모습 바라보기 싫은 고향의 봄 날 하루가 또 지고 있다. 아껴둔 곶감 빼먹듯 아쉬운 봄 날 하루를 보내버리고 말았으니 오늘밤 꿈속에서 다시 고향을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