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뫼마을 고향편지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버들개지 2006. 12. 30. 08:15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김장 끝난 날, 형이 보내온 편지

▲ 포항 사는 누이는 제사 지내러 온 김에 두 눈 찔끔 감고서(?) 김장을 한다.
ⓒ 김도수

포항 사는 누이는 어머니 제사 때 진뫼마을에 달려와 김장을 해간다. 어머니 제사 지내러 와서 김장을 하다 보니 눈치가 보이지만 하는 수 없다. 며칠 뒤 다시 김장하러 먼 길을 달려와야 하기 때문에 제사 지내러 온 김에 두 눈 찔끔 감고서 김장을 한다.

 

누나와 아내 형수님들과 함께 배추를 절이고 새벽에 일어나 씻는다. 이른 아침부터 배추를 양념에 버물리는데 허리가 아프다며 큰형수님께서 막걸리 한 사발씩 돌린다. 막 버물린 배추 한 가닥 쭉 찢어 꿀꺽꿀꺽 마시던 막걸리 한 통개가 어느새 반쯤 줄어들어 있다.

 

“어머님은 얼매나 막내딸을 못 잊고 갔으먼 김장 히서 가지고 가라고 이렇게 김장철에 돌아가셨데아. 행이는 눈감을 때까지는 자식새끼들 못 잊고 사는 게 부모 마음이제.” 큰형수님은 매제에게 막걸리 잔을 계속 내밀며 장모 없는 쓸쓸한 처갓집 방문의 휑한 마음 달래준다.

 

ⓒ 김도수

▲ 큰형수님께서 막걸리 한 사발씩 돌렸다.
ⓒ 김도수

매제는 해마다 어머니 제삿날 처가 식구들 모두 나서서 김장을 해주니 미안했던지 올해까지만 ‘진뫼’에서 해가고 내년부터는 포항에서 한단다. 애지중지 자식처럼 키운 배추, 나는 계속 누이 식구들 입 속에 넣어주고 싶은데 올해가 마지막이라니 무척 서운하다.

 

98년 진뫼마을 고향집을 산 뒤로부터 부모님이 짓던 텃밭에서 자란 배추와 고향 땅에서 솟아나는 물로 김장을 담아 가니 너무 좋다며 이웃집에 늘 자랑하고 다니던 누이.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남편 말에 묵묵부답 배추만 버물리고 있다. 나도 서운한데 누이 마음은 오죽했을까.

 

내년 여름, 나는 또 누이 몫으로 텃밭에 배추를 심을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누이 가족들 담아갈 배추 텃밭에 쑥쑥 자라고 있다고 전하면 혹시 매제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땀 흘려 자식처럼 키운 배추 차마 남에게 주어버리라고 하지는 않겠지.

 

김장 끝내고 묻어놓은 김장독 속에 김치 넣고 돌아오던 날 저녁. 시골이라면 진절머리난다며 기억해 내기 싫다던 서울 사는 내 바로 윗 형이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 김도수

사랑하는 내 아우야!
우연히 도심 골목길에서 만난 막걸리만 보아도
아파트 단지 내 김장 끝난 뒤 남은 시래기만 보아도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난다

 

쉰 보리밥 아까워, 물에 씻어 훌훌 드시던
가난을 뿌리치고자 꾸지나무 가시 두려워하지 않고
모자란 뽕 따서 누에를 치던
소가죽처럼 굳은살 단단히 박혀있던 손

 

농사 끝난 겨울엔 땔나무하러 다니다
부드러워야 할 손이 온통 상처투성이로
밤이면 윗목에 앉아 가시를 빼내던
곪은 살 짜보면 그 속에서
톡 튀어나오던   

시커먼 가시들

 

이제야 어머니 생각이 간절히 나는 걸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가만, 내 나이 벌써 오십이구나

 

요즘 출근할 때 거울을 보면
자꾸 어머니 얼굴 떠올라
새삼스레 너에게 소식 전한다
보고 싶다, 사랑하는 내 아우야


형!
나도 김장하려고 텃밭에 들어가
탐스럽게 자란 배추만 봐도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나

 

배추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아나, 맛 좀 봐라며

배추 뿌랭이 깎아서 입어 넣어주던
어머니 모습 떠올라
한참 동안 발길이 딱 멈춰져부러

 

땔나무하고 돌아와 밤이면 윗목에 앉아
가시를 빼내던 어머니 이야기 들으니
내가 어머니 생살 파고든
가시 같은 자식은 아니었는지
상처 난 곳 어루만져 주며
새살 돋게 하는
효를 다한 자식은 아니었는지
나도 요즘 자꾸만 어머니 생각이 나

 

오늘밤 형이 무척 보고싶다
사랑하는 내 성아야!
배추밭에 나뒹굴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