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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이면 우리 집 아침밥은 늘 늦었다. 날마다 품앗이를 다니던 어머니가 못다 한 일을 새벽에 조금씩 추려가야 했던 까닭이다. 밥상 차려질 시간쯤이면 밥 먹는 마루에는 이미 햇볕이 들어와 있었다. 밥상을 내오기 전 형들은 마루 끝 기둥에 걸쳐진 간짓대에 모포를 걸어 햇볕을 가렸다.
아침밥 먹는 시간은 우리 집 하루 일과가 전달되는 시간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 무엇이 있으니 다른 생각말고 나와 함께 일하러 가자는 어머니의 지시가 떨어지면 자식들은 감히 ‘못한다’고 대꾸 한번 하지 못했다. 혹 싫은 표정 짓고 있다가 어머니 눈과 마주치면 회초리로 한 대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오메 혼자 쎄빠지게 일허는디 너그들은 어찌 편히 지낼라고만 허냐’는 꾸지람이 어머니의 눈흘김 속에 담긴 것 같았다.
월곡떡의 지시가 전달되던 아침밥상 “오늘 삼대논에 풀 매로 갈랑게 호맹이(호미)허고 토시 좀 준비허거라. 논두렁도 깎고 올랑게 낫도 좀 싹싹 갈고. 호랭이 새끼 쳐가게 생긴(그만큼 풀이 우북하다는 뜻) 밭 포도시(겨우) 매 놓고 난 게 삼대논에 피가 많다고 장에 갔다 오는 사람들마다 한마디씩 허더라. 새몰마을 사람들이 보먼 내가 만날 놀고 일은 안허는 줄 알겄어. 아는 사람 만날까봐 겁나 죽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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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라도닷컴 |
어머니는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와 함께 동행해 일하기’를 원했다. 일하는 날에 자식들을 절대 놀리는 법이 없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한번은 들녘에 따라 가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 ‘방학책’을 펴 놓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소용이 없었다. “방학숙제는 저녁판에 히도(해도) 된게 나 따라가자”고 했다. 내 어머니 월곡떡에게는 일하러 갈 때 ‘모자동행’이 원칙이었다.
친구들은 시원한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재미지게 놀고 있는데 어머니 따라 논밭에 가려면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왔다. ‘넘덜 오메는 어린 자식들 데리고 논밭에 안 가는디 왜 우리 오메는 자식들이 노는 꼴을 못 볼까’ 싶어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어머니는 삼대논에 가기 전, 새몰 정자나무 아래쪽에 있는 시제논을 둘러보더니 “여그가 더 난리다. 시제논부터 맬랑게 요리 니롸라(내려 와라)”고 손짓한다.
두 마지기가 채 안 되는 두 다랑이 시제논은 집안 어느 집이나 지어먹을 수 있는 논으로 경작하는 대신 시제를 지내야 한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시제논을 다른 집으로 내주지 않고 지어왔다. 오죽하면 윗것테 사는 ‘귀액이 당숙네’가 “나도 형편이 어려우니 시제논 좀 지어 묵자”고 요구한 뒤에야 그 논이 우리 집 논이 아니라는 걸 알 정도였다.
“쌀 한 톨 입 속으로 걍 들온 줄 아냐. 등골 녹아야 들어 와” 지금이야 모내기 끝난 논에 제초제를 살포해 버리니 논 매는 사람을 볼 수 없지만, 그 때는 논에 풀이 어찌나 많이 나던지 호미로 파 헤집어 맬 정도였다. 한낮 내려 쬐는 불볕 더위 속에 벼 포기 속에 갇혀 풀을 매다 보면 일은 더디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식구들은 시제논에 들어가 몇 고랑씩 맡아 나란히 풀을 매고 피를 뽑았다. 대부분 서너 고랑씩 잡으며 논을 맸는데 밭을 맬 때는 앉아서 맬 수 있어 좋은데 논은 엉거주춤 허리 굽혀 매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허리 굽혀 풀을 매기 싫을 땐 서서 발로 지근지근 밟아 흙 속에 감춰버렸다. 그러다 어머니께 들키면 꾸지람이 날아왔다. “너는 풀 안 뽑고 걍 봅고만(밟고만) 지나가 부냐! 되게 일허기 싫은갑다. 발로 봅고만 댕길라먼 풀 매지 말고 논에서 나가 불어라. 쌀 한 톨 입 속으로 걍 들온 줄 아냐. 등골 녹아야 들어 와.”
어렸을 땐 벼와 피를 구별해 뽑기가 너무 어려웠다. 간혹 벼가 피인 줄 알고 뽑아버릴 때도 있었고 피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버려 혼나기도 했다.
“아, 피를 아직도 구별 못 허냐! 농사꾼 자식이 벼인지 피인지 구별도 못허먼 입 속으로 쌀 들어갈 자격 없다. 딱 보먼 벼인지 피인지 알아야제.”
피도 풀처럼 뿌리까지 뽑아서 둘둘 감아 고랑에 깊이 파묻었다. 논두렁에 던져 놓으면 논두렁 벨 때 치우고 베야 하니 논 고랑에 파묻었던 것이다.
둥근 소쿠리에 가득 담긴 시커먼 꽁보리밥과 호박찌개 뙤약볕에 허리 굽혀 풀을 매다 보면 시간이 오래 흐른 것 같았다. 벼 잎에 살갗이 씻겨 쓰리고 아프고 배도 고팠다. 오직 ‘샛거리’ 먹는 시간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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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니가 쓰던 밥소쿠리와 밥주걱 |
| ⓒ 전라도닷컴 |
시제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길가에 ‘새몰 정자나무’가 있다. 시원한 정자나무 아래서 샛거리를 먹으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가고 오는 시간이 아까웠던지 늘 논두렁에 샛거리를 풀어놓았다. 둥근 소쿠리에 가득 담긴 시커먼 꽁보리밥과 호박찌개. 뙤약볕 아래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훔쳐가며 샛거리를 먹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아직도 그 맛 잊지 못한다.
샛거리를 먹고 나면 정자나무 아래 시원한 그늘에서 좀 쉬었다 해도 좋으련만 어머니는 논두렁에서 그대로 잠깐 쉴 뿐이었다.
“삼대논도 아직 못 맸는디 한가하게 그늘 밑에 들어갈 참이 어딨냐”는 것이었다. 오후 서너 시쯤, 새물 정자나무 아래로 소쿠리를 이고 오는 할머니가 보였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나타나는 ‘소쿠리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어떤 날은 소쿠리를 이고 나타나고 , 어떤 날은 그릇이나 잡다한 생활용품을 가지고 나타났다.
어머니는 소쿠리 장사 할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오면 “반찬은 없지만 배고픈디 밥 한 술 뜨고 가라”고 붙잡곤 했다. 어머니도 6·25전쟁이 끝난 뒤 한동안 다슬기 장사를 다닌 적이 있는데 배고플 때 밥 먹고 가라고 붙들던 집이 제일 고마웠다며 점심 때 장사꾼이 오면 그냥 보내지를 않았다.
소쿠리 할머니는 허연 머리를 단정히 빗고 비녀를 꽂고 다녔다. 목소리가 두껍고 칼칼해 물건을 흥정할 땐 늘 시끄러웠다. “싸게 줄 텅게 소코리 하나 갈아(사) 줘! 무거운 것 이고 댕길랑게 고개가 떨어져 나가 불라고 혀. 보리쌀도 좋고 콩도 좋고 뭐든지 다 받은게 하나 갈아 주제 그려. 정 어려우먼 외상으로 달아 놓고, 잉!”
“빵 같은 것은 묵어도 그만, 안 묵어도 그만이여” 그 날 따라 소쿠리 할머니는 우리 식구들을 큰 소리로 불러댔다. “좀 쉬었다 일 허제 그려! 찐빵 가지고 왔응게 좀 사 묵고 일 혀! 아, 배 안고파! 빵 좀 사 묵고 일허랑게.” 할머니가 외치는 ‘빵’ 소리. 그것은 빵도 먹고 시원한 정자나무 아래서 쉴 수 있다는 희망의 목소리였다. 형들과 나의 눈과 귀는 일제히 정자나무를 향하고 있었지만 어머니 반응은 싸늘했다. “나중에 사 묵을께라우.”
보름달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른 먹음직스런 찐빵. 맛있는 팥이 들어 있는 찐빵을 머리 속에 만 그리고 있자니 너무 먹고 싶어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오메! 나 빵 묵고 싶어 죽겄어. 보리쌀 한 되치만 사 묵으먼 안 되까?”
“보리쌀 내서 너그들 믹이고 갈쳐야 헌디 빵 사 묵어 불먼 되겄냐. 빵 같은 것은 묵어도 그만, 안 묵어도 그만이여. 배 곯아 봐야 서럽제. 빵 같은 것은 묵고 싶을 때 잠시 참아불먼 걍 지나가 불어.”
어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자나무 아래서 ‘빵 좀 사 먹어라’고 할머니가 자꾸 불러대는데도 대답은 한결같이 “나중에 사 묵을께라우’ 뿐이었다.
우리를 포기한 할머니는 빵 소쿠리를 이고 진뫼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할머니 모습이 사라지자 우리 형제들의 희망도 사라졌다. 사라진 찐빵이 아쉬워 오죽하면 서산에 걸려 있는 붉은 해까지 찐방처럼 보였다.
지금도 새몰 정자나무 앞을 지나면 소쿠리 할머니가 찐빵 사 먹으라고 부르면 “나중에 사 묵을께라우” 대답하던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내 어머니 월곡떡, 그 때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얼마나 찐빵을 사 먹이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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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뫼마을 앞 들녘. 재호형이 새벽 일찍 일어나 예초기로 논두렁의 풀을 깎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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