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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몰마을 앞 ‘내지평’ 들녘에 볏짚이 깔려 있다. |
| ⓒ 김도수 |
진뫼마을 사람들은 겨울과 봄의 분수령을 설로 생각한다. 이제 설도 지났으니 긴 농한기 끝내고 들녘으로 나가야 한다. 봄이 찾아왔건만 진뫼마을 농부들은 심란하기만 하다. 아무리 기계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늙은이 몇 명 골골거리며 사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성한 곳 없이 불편한 몸 이끌고 농사짓는 데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설 쇠고 나면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했다. “어쩐다냐. 인자는 설도 쇠아불고. 논 갈아 엎어야 할 날은 무장무장 다가오는디 일 허기는 싫고. 내일은 삼대논에 볏짚 깔러 가야겄다. 얼릉 깔아 놔야 또 논 갈제.”
요즘은 낫으로 벼를 베지 않고 콤바인으로 베기 때문에 탈곡을 하면서 동시에 볏짚도 논 바닥에 줄줄 깔아놓는다.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은 사료로 쓰기 위해 또 우리에 깔아 거름으로 쓰기 위해 말린 뒤 거둬들인다. 가축을 기르지 않는 사람들은 베면서 잘게 잘라 논에 뿌려 거름으로 쓰기도 한다.
콤바인이 나오기 전에는 낫으로 베어 한 다발씩 묶어 차곡차곡 가리를 쌓은 다음 탈곡을 했다. 탈곡이 끝난 뒤 우리 집은 추수하느라 바빠 볏짚을 한 다발씩 묶어 가리로 쌓아두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던진 채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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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해주시던 무조림이 먹고 싶다고 하자 누님이 만들어준 무조림. |
| ⓒ 김도수 |
“넉 아부지는 일 허기 싫으먼 트집을 잡아 집으로 가분다” 79년 봄이던가. 그 해 설 쇠고 새몰마을 앞에 있는 ‘내지평’ 들녘 삼대논에 부모님과 함께 볏짚을 깔러 갔다.
바싹 마른 겉과는 달리 속으로 파고들수록 볏짚은 젖어 있어 무거웠다. 젖은 볏짚을 한 다발씩 묶어 나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일하기 싫으면 무슨 트집을 잡든지 종종 집으로 가는 버릇이 있다. 그 날도 어지간히 일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마르지도 않은 볏짚을 나보고 깔자고 허네. 밑으로 니리갈수록 흥덩거러허게 젖어 있고만 이걸 어치게 깔아. 아, 오늘 허지 말고 까벌려 놓았다가 마르먼 깔아. 나는 안 헐랑게 너그들 깔고 올라먼 오고 말라먼 말아라.”
“넉 아부지는 일 허기 싫으먼 꼭 저렇게 트집을 잡아 집으로 가분다. 넉 아부지 만나 이날 평상 속깨나 상허고 산다. 나 죽으먼 아마 속이 시커멓게 타 있을 것이다. 내가 참고 살아야제. 자식 새끼들 워르르 낳아놓고 어쩔 것이냐. 자식들이 착헝게, 속 상허게 허는 놈 하나 없응게 살제, 내가 어치게 살겄냐. 넉 아부지 보고는 하루도 못 살아.”
“그리도 그렇제. 아부지가 돼 갖꼬 저렇게 성질 냄서(내면서) 가야 쓴당가. 하여간 오메도 남편 복은 지지리도 없어. 다른 아부지들은 안 그러든디 오메가 젊었을 때 확 휘어잡지 못하고 질질 끌려댕김선 살아서 그려.”
“넉 아부지 확 휘어잡을라고 �다가는 너도 아마 이 세상 햇빛 못 보았을 것이다. 젠작 끝장 나불었제. 넉 아부지 일 안허네 안 허네 히도, 촌구석에 사는 사람들치고 뗏꾸장물 안 흘리고 산 사람 어디 있겄냐. 오늘 일허기 싫은게 트집잡아 가분 것잉게 니가 이해허거라. 둘이 열심히 깔다 보먼 다 깔아지겄제.”
씩씩거리며 논두렁에 토라져 앉아 있는 나를 어머니는 살살 달랬다. 나보다 화가 더 치밀어 올랐을 어머니를 바라보니 애달프고 서글펐다. 점심 때가 되자 어머니는 “한 숟가락 뜨자”며 돌 몇 개 주워 검게 그을린 수통을 걸고 볏짚을 태워 시래깃국을 데우고 있었다.
내지평 들녘에 불어오는 찬 바람 맞으며 뜨거운 시래깃국에 찬밥 한술 말아 논두렁에 앉아 후루룩 들이키며 먹는 점심. 무 두껍게 썰어 멸치 넣고 지져 온 ‘무쪼각(무 조림)’ 한 입 넣으면 어찌나 맛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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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논을 갈아 엎고 있는 진뫼마을의 봄. |
| ⓒ 김도수 | 들녘 찬 바람 속에 먹던 ‘무쪼각’ 어찌나 맛나던지 어머니와 하루 종일 열심히 날라도 볏짚은 좀처럼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음날 남은 볏짚과 봇도랑 논에 또 볏짚을 깔러 가야 하는데 아버지는 아침 일찍 구두를 닦고 있었다. 어머니는 구두 닦고 있는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볏짚 깔러 가자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일하기 싫어 아침 일찍 ‘압재틀고’(머리를 이리저리 틀면서 다른 데로 감) 오일장에 가려는데 따져 뭐하겠는가.
장에 가신 아버지는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랫목에 잠시 노곤한 몸 누이고 있는데 이웃집 아제가 찾아왔다. “넉 아부지 술 취해 ‘중전가게’서 자고 있응게 얼릉 마중 좀 나가봐야 쓰겄다”며 기별을 한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루종일 볏짚 깔고 와서 힘든데 일 안하고 장에 가셨으면 일찍이나 돌아오시지. 꼭 마중을 나가게 해야 옳을까. 참말로 미쳐불겄고만’. 컴컴한 밤에 홀로 버스 정류장이 있는 중전마을로 나갔다. 구멍가게에 들어서니 아버지는 술에 취해 가게 안에 딸린 작은 방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아버지를 보자 너무 화가 나 “얼릉 니리 갑시다”며 퉁명스럽게 큰소리로 깨웠다. 가게 문을 빠져 나오는데 아버지 손에는 파장 무렵 떨이로 파는 소금에 절인 갈치 몇 마리가 새끼줄에 꽁꽁 묶여져 들려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 비틀거리는 몸을 부축할 때마다 힘없이 내 품에 안기던 아버지, 그리고 잠바 속에 잡히던 뼈마디들. 강직하고 무섭기만 해 평소 아버지를 안아볼 기회가 없었던 나는 그날 밤 아버지 몸이 너무 가벼움에 놀랐다.
자식들에게 나누어주느라 달아나버렸을 아버지 ‘살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싸해 왔다. 그동안 응어리진 미움은 어느덧 사라지고 애잔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아버지 손에 들려져 새끼줄에 꽁꽁 묶인 갈치처럼 아버지 가족 사랑도 줄줄이 엮여져 있다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이맘때면 내 어머니 월곡떡 볏짚 태워 시래깃국 데우던 내 고향 들녁, 아버지가 “나는 안 헐랑게 너그들 깔고 올라먼 오고 말라먼 말아라” 고함치던 ‘내지평’ 삼대논에 봄이 오고 있다. 시린 볼 감싸며 시래기국에 찬밥 한술 말아 어머니랑 점심 먹던 논두렁에 도 곧 새싹 돋아 푸르러지겠지. 논바닥에 어린 모 들어앉아 푸른 들판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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