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뫼마을 고향편지

"굴풋헐 때 한 그릇 씩 더 묵어라"

버들개지 2008. 1. 30. 09:15
“굴풋헐 때 한 그럭씩 더 묵어라”

“이번 동짓날에는 동지죽이나 한번 쒀 먹제 그려.”
동짓날이 돌아오면 아내에게 늘 해보는 말이다. “나는 동지죽 같은 건 잘 못 쑨게 장날 가서 한 그릇 사 묵어 붑시다. 어차피 어머님 손맛 못 낼 텅게 그게 훨씬 안 낫겄소. 안 그요?” 허구한 날 ‘엄니 손맛 타령’이 달갑지 않았을 아내의 대답이다.

 

ⓒ 전라도닷컴
어머니 부뚜막에 올라 동지죽 끓이던 풍경
동짓날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팥을 삶고 찹쌀을 물에 담갔다. 찹쌀이 불면 절구통에 빻았고 몇 번에 걸쳐 힘들게 빻은 찹쌀을 체에 받쳐 반죽을 했다. 그런 다음 자식들 방안에 불러 모아 멥쌀가루 키 바닥에 뿌려놓고 동글동글하게 새알심을 만들게 했다.

“칭이(키)에 문지(먼지)나 티끄락(티끌) 들어가먼 안 된게 더러운 옷 좀 탈탈 털고 들어와라. 새알 만들라먼 손도 좀 싹싹 씻고 오고. 배까태(밖에) 나갔다 오기만 허먼 너그들은 뭣을 그리 옷에다 묻히고 댕기쌌냐.”

형과 나, 누이는 서로 예쁘게 새알심을 만들겠다며 찹쌀 반죽을 양쪽 손바닥 사이에 넣고 빙글빙글 굴리기에 열중했다. 부엌에서 팥을 삶고 있던 어머니는 자식들이 새알심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궁금해 방을 들락거렸다.

ⓒ 김도수
“아이고메! 요로케 심(힘)없이 만들먼 안 되아. 찹쌀 반죽을 요만큼 적당히 띠(떼)갖꼬 힘을 살살 주면서 요로케 궁굴려야제. 너머(너무) 심없는 것은 죽 쑬 때 주벅(주걱)으로 휘휘 휘젓다 보먼 (새알이) 다 풀어져 불어 못 묵어. 글고 요로케 쬐깐허게 만들먼 묵을 때 간에 기벌(기별)이나 가겄냐.”

어린 우리들은 어머니가 예쁘고 단단하게 만든 새알심을 보고 따라 만들었다. 멥쌀가루 하얗게 뿌려진 키 위에 동그랗고 예쁜 새알심이 뚝뚝 떨어지며 만들어지면 어미 새가 둥지 속에 방금 알을 낳은 것처럼 예쁘기만 했다.

어머니는 팥이 익으면 소쿠리에 건져 올려 주물럭거려 껍질 걸러내고 으깨어진 팥을 다시 무쇠 솥에 넣고 끓였다. 팥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새알심을 넣고 부뚜막에 올라 서로 엉켜붙지 않도록, 솥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주걱으로 살살 휘저었었다.

연기에 그을려 천장과 벽이 모두 시커먼 부엌에서 아들은 아궁이에 불을 때고 어머니는 부뚜막에 올라 동지죽 끓이던 동짓날 오후의 풍경. 솥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아궁이에서 솟는 매캐한 연기에 어머니는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식구들 배불리 먹일 생각에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동지죽을 쑤면 어머니는 부뚜막 정면 한복판에 있는 조왕중발(부엌을 맡는 신, 제비집 모양의 대(臺)를 부뚜막 한 가운데 흙으로 붙여 만든 곳에 매일 아침 샘에서 길어온 깨끗한 물을 떠놓고 비는 종지) 아래다 먼저 한 그릇 퍼 놓았다. 그리고 액운을 막고 잡귀를 쫓는다 하여 뒤란 돌담 밖으로 돌면서 몇 번인가를 뿌리곤 했다.

ⓒ 김도수

윗목에 퍼 놓던 동지죽 한 양푼


동짓날이면 어김없이 가족들이 안방에 빙 둘러앉아 아삭아삭 씹히는 김장김치와 싱건지 곁들여 먹던 뜨끈뜨끈한 동지죽 한 그릇.

붉은 팥죽 속에 새알심 알알이 들어있는 동지죽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자기 나이보다 동지죽 한 그릇 더 먹으면 그 때마다 나이가 한 살씩 더 많아진다는 아버지 얘기에 형과 나는 몇 그릇 먹었는지 다투며 세었다. 동생에게 지지 않으려던 형보다 두 살 많은 형의 나이를 추월해야 했던 나의 배가 더 빵빵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아버지는 동지죽을 먹을 때마다 무심한 세월을 한탄했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가고만. 나이는 점점 묵어가고 히(해) 놓은 일은 하나 없고….”

저녁상 물리고 설거지 끝낸 어머니는 “굴풋헐(시장기 있을) 때 한 그럭(그릇)씩 더 묵어라”고 다시 동지죽 한 양푼 가득 퍼다 윗목에 놓고는 상보로 덮어놓았다. 일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아랫목에 솜이불 펴 놓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부모님이 들려주는 옛이야기 듣고 있으면 어느새 배는 출출해지고 식구들은 또 동지죽을 먹었다.

시원한 싱건지 국물 후루룩 마시며 밤참으로 먹던 동지죽. 해마다 동지가 돌아오면 어머니가 끓여주던 뜨끈한 동지죽 한 그릇이 너무도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