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뫼마을 고향편지

내 어머니 쌀자루 이고 가던 ‘진뫼오리길’

버들개지 2008. 10. 19. 22:38

▲ 벼 베는 이웃집 어머니를 보니, 전주에서 자취생활 하던 아들을 위해 휴일이면 무거운 쌀자
루 이고 진뫼 오리길 걸어 배웅해주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 김도수

진뫼마을에서 버스 정류소가 있는 중전마을까지 걸어나가려면 보통 20∼30분 걸린다.
전주로 전학을 가게 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자취생활이 시작되면서 그 길은 휴일이면 무거운 쌀자루와 김치통을 메고 가는 길이 되었다.

언제나 동구 밖 ‘몰무동’쯤 가면 손에 힘이 다 빠졌다. 기안이양반네 감나무밭 작은 언덕에 쌀자루와 김치통을 내려놓고 쉬면서, 나는 두 바퀴로 굴러가는 것들이 제일 갖고 싶었다. ‘자전거 한 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리어카 한 대가 있다면 이 세상 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디….’

어쩌다 마을 쪽에서 차가 나오면 ‘혹시 나 좀 태워 줄라나… 어린 학생이 낑낑대며 쌀자루를 메고 가는데 태워줄 수도 있겠지’ 하고 잔뜩 기대를 했다. 하지만 차는 언제나 먼지만 뿌옇게 일으키며 ‘홱’ 지나가 버렸다.

허탈감에 더욱 멀고 팍팍하게 느껴졌던 그 길에서 나는 다짐하곤 했다. ‘언젠가 돈을 벌면 자전거도 사고, 리어카도 사고, 자동차도 사야지. 차를 사서 짐 들고 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꼭 태워줘야지.’

ⓒ 김도수

“내 새끼가 무거운 쌀자루 메고 어치게 갈랑가…”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 날도 품앗이를 가야 했던 어머니는 내가 오후에 가져갈 쌀과 반찬을 미리 챙겨 놓았다. “굶지 말고 꼭 밥 해 묵고 댕겨라 잉. 한참 클 때 밥 굶으먼 키가 안 커 불어. 알았제.”

그렇게 신신당부하고 나간 어머니가 점심 때 집에 돌아오셨다. 
“내 새끼가 무거운 쌀자루 메고 어치게 중전까지 갈랑가 걱정이 되아서 점심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달려왔다. 점심 한 끄니 안 묵는다고 어디 죽을라데아. 넘들 점심 묵고 밭 매러 들어가기 전에 가야 헝게 얼릉 서두르자.”

얼마나 부리나케 달려왔는지 거친 숨 몰아 쉬며 흥건히 맺힌 땀방울을 훔치고 있는 어머니. 중전마을까지 쌀을 이어다 주고 밭으로 달려가면 품앗이꾼들은 이미 밭에 들어가 있을 시간일 것이다. 아무리 종종걸음 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 어쩌자고 어머니는 그 먼 평밭에서 점심도 굶은 채 집으로 달려왔을까.

머리에 얹힌 무거운 쌀 때문에 가냘픈 목에 붉게 튀어나온 핏줄기들.
“오메! 잠깐 쉬었다 가. 김치통이 무거워서 손이 빠져불라고 혀. 오메는 고개 안 아파?”
“쉬었다 가먼 더 늦어. 넘덜 눈치보고 왔는디 많이 늦어 불먼 욕 얻어묵어. 심들어도 얼릉 가자.”
그 날 무거운 쌀자루 이고 가는 어머니 뒤를 따르며 나는 다시금 결심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자전거도 사고, 리어카도 사고, 자가용도 사야지. 어머니 머리에 얹어진 저 무거운 쌀자루 내려놓으시게 해야지.’

▲ 진뫼마을 앞 논의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 김도수


“콩 조께 팥 조께 싸들고 너그 집에 가 보고 죽어야 헐 턴디”

추수 끝난 어느 일요일 오후, 어머니와 나는 결혼한 형님들에게 보내줄 곡식 한 보따리씩 싸들고 진뫼 오리길 위에 서 있었다. 복두형님네 논다랑이를 지나가는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막둥이 니 장개 보내고 콩 조께(조금) 팥 조께 보따리 보따리 싸서 너그 집에 가 보고 죽어야 헐 턴디. 각시 쨈매(묶어) 주고 사는 모습 보고 죽으야 여한이 없을 턴디.”
하지만 어머니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추수 끝난 가을, 이웃집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줄 고추며 참깨며 말린 호박이며 보따리 보따리 싸 들고 자식들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보면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머니가 손수 싸 주시는 곡식들 나도 한번 받아볼 수 있다면 어깨춤 덩실덩실 출텐데, 어머니 ‘소원’ 이루어졌노라고 소리라도 지를 텐데, 안아주고 볼도 비벼 볼 텐데….

어느 해 부안에 살고 있던 큰형님 가족이 왔다. 집 떠나던 날 아침, 마루에는 쌀 고구마 고추 콩 등 보따리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큰형님은 짐 보따리가 많자 바지게를 챙겼다. 큰형님이 지고 나간 지게를 누가 따라가서 짊어지고 와야 할 형편이 됐는데 내 위에 형도, 나도 가기 싫어 외면하고 있었다.

“넘들 챙피허게 내가 꼭 지게를 짊어지고 니롸야 쓰겄냐? ‘누구네 집은 어메가 지게를 지고 갔더라’ 소문나믄 꼴 좋겄다.”
형님 바지게에서 보따리 하나를 기어이 내려 이고 따라 나선 어머님은 형님 가족들을 버스에 태워 보내고는 빈 바지게를 지고 마을로 내려왔다.

ⓒ 김도수


그 참에 마을회관 앞에 나갔던 나는 빈 바지게를 지고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는 어머니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무엇이든지 이는 것이 편하다는 어머니였지만 바지게를 머리에 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람 불면 날아갈 듯 가냘픈 어깨에 바지게를 짊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가 바지게 지고 걸어온 그 길. 타향을 떠돌면서 늘 눈에 아른거리던 진뫼 오리길.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 길 강 길 곁으로 지금 누런 벼들이 고개 찰랑거리며 둥지 떠난 마을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