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진뫼마을 고향집 마루에 올려진 보따리. 언젠가 고향집을 사서 돌아가는 날, 가족들이 일할 때 입으리라고 헌 옷과 양말, 낡은 운동화, 실장갑 등을 보따리에 채곡채곡 쟁여서 간직했던 날 들이 있었다. |
| ⓒ 김도수 |
진뫼마을 고향집을 사기 전, 내 살던 아파트 베란다 한켠에는 보자기로 싸놓은 보따리들이 포강포강 포개져 있었다. 보따리 속에는 언젠가 고향집을 사서 돌아가는 날, 가족들이 일할 때 입을 헌 옷과 해진 양말, 낡은 운동화, 쓰다 남은 실장갑 등이 들어 있었다. 고향집을 꼭 사고야 말겠다는 꿈이 보따리 보따리 베란다에 쟁여져 있었던 것이다.
‘내 생애 저 보따리 푸는 날 꼭 있으리라’ 보따리 숫자가 늘어갈 때마다 아내의 잔소리도 늘어만 갔다. “시골집도 아니고 아파트에 뭔 놈의 보따리들을 요로케 쌓아두는지 모르겄어. 정작 집 주인은 팔 생각도 안 허고 있는디 혼자 김칫국이여. 지난번 집주인 아저씨가 안 그러던가요. 헌 집 밀어불고 이층 양옥으로 좋게 지어서 살 것이라고.”
아내의 잔소리가 심해지자 천덕꾸러기가 된 보따리들을 남원 처갓집으로 옮겼다. 처갓집은 마루 한켠에 짐 쟁여둘 공간도 있고 무엇보다 장모님이 뭐라 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정작 장모님은 뭐라 하지 않는데 아내의 잔소리는 친정에 가서도 여전했다.
“엄마, 김서방 참말로 이상한 사람이제 잉. 집 주인은 지금도 절대 안 판다고 고개 살살 내두르고 있는디 저렇게 헌 옷을 모아두고 난리당게. 낼 모레 곧 집 사서 이사 갈 사람 같애. 저러다 세월 가먼 옷 다 삭아불 것이고만.”
고향에 갈 때마다 집 주인은 몇 년 동안 한결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절대 집 팔 일 없을 것이요”
그러니 아내 말이 백 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고향집에 돌아갈 꿈을 버릴 수 없었던 나는 그 옷 보따리도 버릴 수가 없었다. 남들한테는 ‘씨잘데기 없는 보따리’로 보이지만 내게는 ‘고향집 사서 마을 길 당당하게 활보하는 꿈’을 야무지게 묶은 설레임의 보따리였던 것이다.
 |
 |
▲ 고향집 사서 돌아갈 꿈을 다지며 기어코 간직했던 보따리 덕분인지 나는 고향집을 되찾아 진뫼마을의 봄여름가을겨울 풍경을 다 누리며 산다. |
| ⓒ 김도수 |
아내의 잔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장모님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씀이 없었다. 워낙 말씀이 없는 분인지라 ‘우리 사우(사위)가 조깨 특이허긴 혀’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장모님은 차곡차곡 쌓아둔 보따리들을 이불 보자기로 잘 덮어 보관해 두고 있었다.
처가에 가서 헌 옷 보따리를 볼 때마다 ‘내 생애 저 보따리 푸는 날 꼭 있으리라’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꿈이 현실로 이어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다림에 몹시 지친 날은 괜히 보따리만 쌓아두고 있는 건 아닌지, 버려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어찌 내 꿈보따리를 그리 쉽게 던져버릴 수 있겠는가.
해가 갈수록 먼지 뒤집어 쓰고 있는 보따리를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지 장모님은 마당 한켠 작은 창고 구석탱이에 그 보따리들을 옮겨다 놓았다. 어둠 속으로 들어간 내 꿈 보따리. 언제 햇볕 볼지 기약도 없는 세월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옷보따리 거그서 아조 썩어불 줄 알았네” 98년 봄. 어둔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보따리들이 드디어 하나씩 들려져 나왔다. “아따, 우리 사우가 집념 하나는 대단허고만. 나는 그 옷보따리 거그서 아조 썩어불 줄 알았네. 근디 견치(기어이) 끄집어 내불고 마네 잉.”
묵은 보따리를 기약 없이 보관해 주었던 장모님은 고향집에 가지고 갈 보따리를 챙기는 내게 귀한 선물까지 안겨 주었다. “우리 학독(돌확)허고 괜찮은 장독 몇 개 자네 집에다 가져다 놓소. 나 죽으먼 내 살림 다 사라져불 것인디, 자네 허는 것 봉게로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 같혀.”
고향 집 안방 벽에 허름한 옷가지들 주렁주렁 내걸리던 날, 꿈을 실현한 자만이 지어 보일 수 있는 환한 웃음꽃을 그 벽에 걸었다.
 |
 |
| ▲ 진뫼마을 고향집 마당에 놓인 장모님의 돌확과 장독들. |
| ⓒ 김도수 |
 |
| ⓒ 김도수 | 구멍 뚫린 양말, 해진 속옷, 낡은 운동화에 빛 바랜 겉옷 걸쳐 입고 삽 들고 텃밭에 나가 씨앗 뿌리던 그 봄이 내겐 얼마나 따스하고 행복했던지. 그렇듯 행복한 봄을 올해로 벌써 열 번째 맞이했다.
고향집 사서 돌아가던 날, 장모님 모시고 앞산에 핀 산벚꽃 강물에 어리는 진뫼마을 봄 풍경을 보여드렸다.
“마을이 참말로 이쁘게 들어앙겄고만 잉. 뒤에는 산이고 앞에는 강이고. 근디 요런 첩첩산중에 뭐 하나 날 것이 없고만 뭣으로 돈을 만들어 자식들 갈쳤는가 모르겄네. 자네 부모님도 참말 애깨나 쓰셨겄네….”
안방에서 한숨 주무시고 나서는 “흙집이라 여름에는 겁나게 시원허겄네. 인자 우리 사우집에 놀러와야 쓰겄네” 하시며 무척 좋아하시던 장모님은 그 해 여름, 지병이 악화되어 더 이상 진뫼마을에 오지 못하고 먼 길 떠나시고 말았다. 고향집 뜰방과 장독대 한켠에 자리를 잡은 장모님의 돌확과 장독을 들여다 볼 때마다 말없이 사위를 품어 주시던 장모님의 속 깊은 정을 생각하곤 한다. 고향집 사서 돌아갈 꿈을 간직했던 보따리. “언젠가 저 보따리 고향집 안방에 꼭 풀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던 나의 보따리처럼 누구든 꿈보따리 하나씩은 보듬고 살아간다면 팍팍한 세상살이에 따뜻한 희망이 되지 않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