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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전 시골에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맞춰주는 게 지게였다. 지게를 보면, 상급학교에 진학시키지 못한 자식을 바라보며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을 농촌의 아버지들이 생각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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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닷컴 김태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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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겄냐. 가방 대신 일치건치(일찌감치) 지게 하나 맞춰서 농사나 배워야제. 그리야 우리집 굶어 죽지 않고 밥 묵고 살어. 헐 수가 없는 일이여….” 시골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맞춰주는 게 지게였다. 지게는 농촌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필수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짊어져야 하는 게 지게였다.
상급학교에 진학시키지 못한 자식을 바라보며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을 농촌의 아버지들. 가난에 찌든 삶에서 벗어나려면 어린 아들과 함께 열심히 일을 하는 것 말고 다른 방도가 있었으랴. 그러니 어린 아들의 등에 맞는 지게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체형 맞춤형 지게 만드는 장기동 양반과 길홍이 당숙 지게를 오일장에 가서 사왔다는 소리를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진뫼마을엔 지게를 아주 잘 짜 맞추는 사람이 있었다. 장기동 양반과 길홍이 당숙이었다.
아버지들은 평소 산에 다니며 지게를 만들 수 있는 소나무 가지를 눈 여겨 봐두었다가 베어와 헛간에 보관해 둔다. 막 베어온 나무로 지게를 짜 맞추면 뒤틀어지기 때문이다. 지게를 만드는 나무 왼쪽 지겟다리는 왼쪽으로 약간 휘어지고, 오른쪽 지겟다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휘어져야 지게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래야 무거운 짐을 지고 땅에서 버티고 일어설 때, 또 받칠 때 힘의 균형을 이뤄 안정적이다.
장기동 양반과 길홍이 당숙은 지게를 사용할 사람의 키나 몸집을 고려해 지게를 잘도 맞춰냈다. 지게를 맞춰주면 곡식으로 갚든지, 아니면 농사일로 때웠다. 지게를 맞춰 마을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짊어지고 나오는 사람들은 으레 자랑을 하곤 했다. “내 지게 끝내 주제 잉! 멜빵걸이(볏짚으로 꼬아 만든 멜빵)도 딱 맞제, 지게발(지겟다리)도 내 허리랑 적당허제, 오늘 나무 한 짐 멋지게 짊어지고 와 봐야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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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내린 진뫼마을. 지게에 염소 밥 한 짐 지고 가는 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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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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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집에 지게 지고 모여들던 마을 남자들 어린 시절, 지금처럼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마을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초상집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도와줄 일이 뭔가 파악한 후 최선을 다해 각자 맡은 일을 해준다.
눈이 많이 내린 그 날, 오후쯤 되자 아버지들과 청년들은 지게를 짊어지고 초상집으로 모여들었다. 밤새 초상집을 지켜주려면 마당에 불을 피워야 하기 때문에 소나무 한 짐씩을 베러 가려는 것이다.
화목(땔감)을 하러 나서기 전, 술상 앞에 빙 둘러앉아 막걸리 한 잔씩을 든 마을 남자들은 멜빵 위로 작대기를 끼워 넣고 마당을 나섰다.
“해 떨어지먼 추운게 가까운 뒷산으로 가서 얼릉 비어와야 쓰겄고만.”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초상이 났을 때는 가까운 뒷산에 가서 얼른 소나무 한 짐씩을 베어왔다. 초상이 났는데 소나무 몇 개 베어왔다고 나무랄 산 주인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초상이 나면 이장이나 마을에서 말깨나 하는 사람이 자진해 나서서 일을 진두지휘하곤 했다.
“눈 속에서 나무 비어 오니라고 애들 썼고만. 춘게 요 놈 한 잔씩 허소. 근디 자네가 제일 큰 나무를 비어와서 한 토막 올려 놔 불먼 밤새도록 타겄네.” 사발에 그득 막걸리 부어 건네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는 말도 함께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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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가면 언제오나 서러워서 못가겄네….” 이승의 집을 나와 저승의 집으로 떠나는 꽃상여. 애간장 저미는 선소리는 삼쇠 양반, 동팔 양반, 문수 양반의 몫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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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자리 파는 일은 종길이 아제, 한수 형님, 아룅이 양반 몫 다음 날 아침엔, 이웃마을 풍수 아저씨가 아침 일찍 내려왔다. 높은 산에 있는 묏자리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풍수 아저씨 뒤로는 삽과 곡괭이 같은 걸 바지게에 짊어지고 마을에서 괭이질깨나 하는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종길이 아제, 한수 형님, 아룅이 양반이었다. 풍수 아저씨가 선산에 올라가 자손대대로 복을 누릴 수 명당터를 잡으면 세 분은 번갈아 가며 쉬지 않고 청강자리(관이 들어가는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한겨울 언 땅을 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같으면 굴삭기로 쉽게 팔 일을 하루 종일 몇 분이서 애를 써야만 했다. 큰 돌이 나오면 해머로 내리쳐서 깨내고, 돌이 깊게 박혀 있으면 철창으로 뽑아 올리고, 단단한 땅이 나오면 곡괭이로 찍어대며 파야 했다. 술과 간식거리를 들고가 일을 도와주던 아저씨는 전령이 되어 청강자리 작업 진척도를 전해왔다.
“오전 내로는 못 파겄던디. 오후 늦게나 다 팔 것 같혀. 큰 독댕이들이 많이 깔렸고 땅이 단단히서 여간 힘든 게 아니더라고. 술허고 뭣 좀 묵을 것 더 갖다줘야 쓰겄어.” 아룅이 양반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되었을 무렵 서울로 이사를 갔다.
한번은 끌텅나무를 하러 따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앞산 중턱쯤에서 잠시 지게 받치고 쉬는데 작은 관솔나무(소나무 끌텅이 썩은 붉고 기름진 나무) 가지가 바지게 밖으로 나와 덜렁거리는 것을 보고 눈길을 주고 있었다.
“너, 요 놈 띠어(떼어) 가고 싶제?”
아룅이 양반이 그 관솔을 낫으로 베어 떼어주던 생각이 난다. 그 관솔에 불을 붙여 강변 돌 속에 집어넣고는 연기에 뛰쳐나온 들쥐를 쫓아다니며 친구들과 불놀이하던 일이 눈에 선하다.
종길이 아제와 한수 형님은 내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마을에서 가장 힘들고 굳은 일이 생기면 맨 먼저 달려들어 내 일처럼 해주는 분들이다. 대학교 3학년 때 죽은 셋째 형 상여를 메고 가 묻어주었고, 몇 해 전 선산으로 이장할 때도 종길이 아제가 달려와 누워있던 형의 몸을 일으켜 세워 주기도 했다. 종길이 아제는 양쪽 발에 썩지 않고 신겨져 있던 형의 나이론 양말을 벗겨 주며 “참… 참…”을 연발하며 담배 한 대 물더니 흘러가는 강물 무심히 바라보며 눈물을 끌썽이던 인정 많은 분이다.
돼지 잡는 일은 강심장에 칼질 뛰어난 명동이 양반 초상이 나면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 할지라도 돼지 한 마리는 잡는다. 문상 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돼지는 아무나 나서서 잡지 못한다. 강심장에 칼질이 뛰어나고 내장을 척척 분리하여 손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돼지는 명동이 양반이 최고로 잘 잡았다. 도치(도끼)와 칼을 날카롭게 간 뒤 해머로 돼지 머리를 힘껏 내리친 뒤 곧바로 목에 칼을 꽂아 솟구치는 피를 받아내야(순대를 만들려면) 하는 일이다.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어찌 달라들 수 있는 일이겠는가.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던 한겨울. 마을 사람들은 죽은 돼지를 바지게에 짊어지고 땡땡 얼음 잡힌 강가로 향하고 있었다. 마을에 초상이 났으니 얼음장 속에 손 담그는 일을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얼른 돼지를 손질해서 초상집에서 일하는 분들께 뜨끈한 곱창과 순대 한 그릇씩 대접하고, 외지에서 문상 온 손님들에게도 고기를 삶아 대접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돼야 하니 애시당초 서툰 사람이 돼지 잡는다고 달라들어 는지럭거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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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대 초 진뫼마을 어머니들이 함께 한 사진. 모두 생활의 달인들이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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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일에 관해서라면 소지 당숙모 문상 온 손님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면 부엌에서 술상 차리는 어머니들은 무척이나 바쁘기 마련이다.
초상이 나면 우선 장보기부터 시작해 음식을 장만하고 술상과 밥상을 차려 내고 설거지까지 척척 해내야 한다. 이런 부엌일에 관해서라면 소지 당숙모를 따를 사람이 없다.
“큰일 닥치먼 니 일 내 일 따로 있가디. 힘 닿는 데까지 열심히 혀야제. 그리 허다 봉게 넘덜이 일 잘 헌다고 허겄제. 나도 음식은 뭐 특별히 잘 헌 것은 없어. 상에 놔야 헐 것 빠지지 않게 챙기고, 넘덜보다 손이 좀 빨라서 후다닥 해치워분게 그러고들 말허겄제.”
소지 당숙모님은 내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집안 대소사는 물론 마을 애경사를 빠짐없이 쫒아다니며 부엌일에 뛰어든다. 장보기를 해온 당숙모님은 또 어찌나 숫자 개념이 밝던지 수첩에 일일이 적어 오지 않아도 척척 맞춰낸다. “뭣은 얼매나치를 샀고, 뭣은 얼매 달라고 헌 것을 견치(기어이) 깎아서 얼매에 샀고, 이번에 손님이 어느 정도 올 것 같응게 어느 양만큼 사면 얼추 맞을 것 같아서 요만큼만 샀어. 총 가지고 간 돈에서 쓰고 남은 돈이 얼매여” 하면 계산할 것도 없이 딱 들어맞는다.
당숙모님은 아직도 동네 제사나 나이까지 줄줄 꿰고 있다. 지난번 마을회관방에서 어머니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는데 “도수는 시방 몇 살이나 묵었데아?” 이웃집 어머니께서 물었다. “우리 경숙이허고 동창인디 한 살이 애려(어려). 생일이 섣달인가 될걸.” 이렇게 답한 이는 물론 당숙모님이다. 정말 놀라운 기억력이다. 당숙모님 앞에서 제사 날짜나 어르신들 나이를 우겨서 이기는 사람을 못 봤다. 우리 어머니처럼 당숙모님도 학교 문턱도 가본 일이 없는데 속셈 하나는 전자계산기 두들겨 맞추듯 정확히 맞춰낸다. 지금도 우리 부모님 돌아가신 해와 달, 살아 계셨으면 지금 나이가 몇 살 잡수셨고 누구와 동갑이라고 척척 맞춰낸다.
애간장 저미는 선소리는 삼쇠 양반, 동팔 양반, 문수 양반 이승의 집을 나와 저승의 집으로 떠나는 꽃상여 나가는 아침. 삼쇠 양반은 소 목에 매달려 딸랑거리는 핑경(워낭)을 가지고 나와 상여 앞에 서서 선소리를 시작한다.
삼쇠 양반은 애절한 목소리로 마을 사람들 애간장을 저미게 하는 선소리의 달인이다. “이제가면 언제오나 서러워서 못가겄네…”
삼쇠 어르신의 구슬픈 절규에 ‘어∼ 노우, 어∼노우’ 상여꾼들이 그 소리를 받아 외치면 아무리 메마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물을 쏟아내고야 만다. 삼쇠 어르신이 선소리를 하지 않으면 동팔 양반이나 문수 양반이 나서서 하곤 했는데 세 분 다 선소리의 달인이셨다.
축문은 멋진 필체의 정규 양반 돌아가신 뒤 탈상이 돌아오면 정규 양반은 멋진 필체로 축문을 써왔다. ‘참사’라는 직함으로 면사무소에 다니기도 하고 이장을 보기도 했는데 마을에서 한문을 가장 많이 아는 분이다. 그래서 마을에 탈상이나 시제, 논밭을 팔고 사는 계약서를 쓸 때 으레 달려와 도맡아 써주곤 했다. 마음씨가 어찌나 후덕하던지 웬만해서는 얼굴 찡그리는 법이 없고 항상 웃으며 사는 포근한 아버지 상의 마을 대표였다.
한번은 내가 고등학교 때 시제 축문을 써달라고 아버지 심부름을 갔는데 내가 읽어야 하는 줄로 알고 휘갈겨 쓴 한문 옆에 자상하게도 연필로 한글 토를 달아 주기도 했다.
밭 모서리까지 쟁기질하던 명렬이 당숙과 길홍이 당숙 올해는 설날이 1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들어 있다. 1월이면 엄동설한이지만 설 연휴가 지나면 진뫼마을 사람들에게는 봄이 시작되는 춘삼월이나 마찬가지다. 설이 지나고 나면 진뫼마을 사람들은 “이제 편히 쉴 날 다 가부렀다”고 아쉬워하며 심란한 봄을 맞이한다.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분들이 있다. 쟁기 짊어지고 ‘이라, 자라’ 소를 몰며 진뫼마을 산골짜기마다 들어가 소리치며 논밭을 갈던 명렬이 당숙과 길홍이 당숙 두 분이다. 두 분 다 소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고 밭 모서리까지도 쟁기가 지나가지 않은 땅이 한 군데도 없을 정도로 아주 꼼꼼하게 진뫼마을 논밭을 갈아주는 쟁기질의 달인이셨다.
모든 일에 늘 긍정적으로 사셨던 명렬이 당숙은 이야기도 곧잘 하셨다.
“소는 겁이 겁나게 많은 동물이여. 눈을 봐봐. 얼매나 큰가. 낮에는 핑경 소리 딸랑거리며 씩씩허게 걸어 댕겨도 밤에 소를 몰고 가보면 핑경 소리가 안 날 정도로 조심조심 걸어가. 핑경소리가 나먼 다름 짐승들이 쫓아올껨시(쫓아올까봐) 무서워서 그런가벼. 그렇게 겁이 많애.”
장구를 치면 손이 보이지 않던 판조 형님 설 지나고 대보름이 돌아오면 윗것테 한수 형님 집부터 맨 끝 집인 윤환이 형님 집까지 집집마다 부엌과 장독대 마당을 돌며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풍물놀이를 하던 사람들. 꽹과리 치며 굿판 맨 앞에 서서 상쇠 노릇을 하던 아버지. 그 뒤로 장구를 치던 판조 형님과 징을 치던 최센 양반, 그리고 소고를 하던 문수, 백식, 이환이 양반.
그 중 장구를 신명나게 잘도 치던 판조 형님은 장구채를 좌우로 왔다 갔다 두들길 때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판조 잘헌다, 잘혀!’ 환호성을 질러 대면 형님은 더욱더 장구채를 힘차게 두들겨 첩첩산골에 풍악소리 크게 울려 퍼지게 했다.
지금 진뫼마을은 모두 열네 가구에 총 스물 다섯 명이 산다. 이 중 부부가 함께 생활하며 사는 집은 다섯 집뿐이다. 세월 흐르면서 떠나간 사람들의 빈 자리엔 기억만 남았으니, 저마다의 재주와 솜씨로 서로의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귀한 존재로 한데 얼려 살았던 그 아리땁던 마을이 눈물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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