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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하던 저리소산. 눈 내린 산에 강 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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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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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뫼마을 산꼭대기 파란 하늘에 걸쳐진 촘촘한 나무들 사이로 칼바람 지나가는 소리 들려온다. 내가 고향을 떠나던 86년까지만 해도 하늘과 맞닿은 산꼭대기에는 소나무 몇 그루 외엔 거의 나무가 서 있지 않았다.
추수 끝내고 나무들 옷 벗기 시작할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은 땔나무를 하러 산으로 달려갔다. 가까운 강변을 시작으로 햇볕 잘 드는 앞산부터 차근차근 벗기기 시작했다. 급기야 앞산이 훤해지면 또 다른 산을 넘어 먼 길 마다 않고 하루 두 짐씩을 꼬박꼬박 해 날랐다.
산이 없는 마을 북쪽 입구만 빼고 마을 앞뒷산과 남쪽 저리소산 정상까지 모두 발가벗겨져도 마을에서 유일하게 나무를 하지 못하는 곳이 있었다. 저리소산 중간쯤에 있는 동네까끔(비탈)이었다. 동네까끔은 홍두깨날부터 칼등날 8부 능선쯤까지인데 땔나무로 좋은 싸재비(섶)나무들이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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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싹 말려서 때먼 불끝도 좋제, 까시도 없제, 풋나무처럼 버르르 타지도 않제.” 싸재비 나무는 막 시집온 새 며느리나 때는 고급 나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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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유일하게 나무를 못하던 저리소산 동네까끔 저리소산은 작은 산이지만 골짜기마다 등성이마다 각각 부르는 이름이 있다. 상급배미 끝자락 개울물 건너면 몇 마지기의 논과 이제는 묵정밭이 되어버린 밭들과 밤나무 밭이 나오는데 이 곳을 ‘지땅’이라 부른다. 그 다음 큰 골짜기 2부능선쯤 찬샘 있는 곳이 ‘큰골’, 날등성이 홍두깨처럼 상하로 길게 뻗었다 해서 ‘홍두깨날’, 다음이 마을 공동산인 ‘동네까끔’, 날등성이 상하로 칼처럼 뻗었다 해서 ‘칼등날’, 작은 골짜기가 있는 ‘작은골’, 작은골 왼쪽 9부 능선쯤에는 ‘수드렁책이’가 있다. 수드렁책이는 겨우내 응달이 져서 바위 위에서 찔끔찔끔 흘러내린 물이 얼어붙어 대롱대롱 매달린 고드름이 수정(수드렁)처럼 맑다고 붙여진 이름 같다(진뫼마을에서는 바위를 ‘책이’라 부른다).
수드렁책이 왼쪽으로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발길 닿지 않는다는 ‘망태목’이 있다. 수드렁책이에서 강변 얼음바위까지 왼쪽으로는 ‘삼재’라 부르는데, 안다물마을 넘어가는 산길에 삼(대마)을 재배하는 밭이 있어서였지 싶다. 삼재는 5부능선을 기준으로 ‘아랫삼재’ ‘윗삼재’라 하는데 산판을 하기 위해 길이 나 있어 나무하러 다니기에 편했던 곳이다.
작은 산 골골샅샅에 붙여진 그 이름들. 오랜 후에도 잊혀지지 않고 여기 살아갈 사람들이 저리소산 바라보며 저그는 홍두깨날, 저짝은 칼등날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뫼마을에서 가장 큰 바위인 수드렁책이는 들녘에 일하러 갔던 사람들에게 시계 역할을 해 냈다.
“쥔 양반! 점심 묵을 시간 돼았는가벼. 수드렁책이에 햇볕 들기 시작허고만. 인자 밥 묵더라고.”
수드렁책이에 햇볕이 들면 들일하던 마을사람들은 점심 먹을 시간 되었다고 논밭에서 나왔던 것이다. 저리소산은 북쪽을 향해 일자(一)로 길게 뻗어 있어서 햇볕 드는 시간이 매우 짧아 눈이 내렸다 하면 잘 녹지 않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겨울철이면 저리소산을 바라보며 “언제 저리소에 눈이 녹는다냐!” 하며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존 말로 헐 때 그 나뭇짐 갱본에다 부리놓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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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까끔은 어느 누구도 들어가서 나무를 할 수 없는 곳이다. 땔나무를 팔아 마을 운영자금으로 썼기 때문이다. 만약 나무를 해오다 들키는 날이면 창피를 톡톡히 사야 했다.
어느 날 마을 한 분이 나무를 하다가 들켰다. 이장이었던 아버지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어이! 누구는 동네까끔에 가서 나무 헐 줄 몰라서 안 들어가는 줄 아는가? 존 말로 헐 때 그 나뭇짐 갱본(강변)에다 부리(부려)놓고 가. 그라니도 동네 돈이 없어 울력 좀 히서 자금 좀 만들어 쓸라고 힜는디 자네가 존 싸재비만 골라서 비어와 불어? 안 부리 놓고 갈라먼 벌금을 내던지. 안 그맀다 허먼 동네방네 나발불고 댕기불랑게.”
땔나무 울력은 한 집에 한 명이 나오든 두 명이 나오든 할당된 나뭇짐(대부분 두 짐)을 땔나무 사는 집 마당에 부려 놓는 일이다. 30가구가 조금 넘게 살았으니 한 집에서 많은 양의 나무를 한꺼번에 다 사지는 못하고 여러 집이 나누어 샀다. 이장은 땔나무 사는 집 마당에 서서 나뭇짐 부릴 때마다 누가 몇 짐을 해 왔는지 확인을 했다.
동네까끔에서는 모내기할 때 논에 비료 대신 뿌리는 갈풀도 하지 못하게 했다. 봄이면 울력을 통해 동네까끔에서 자라는 풀을 베어다 논이 많은 집(열 마지기 조금 넘는)에 팔아 동네 운영자금으로 썼던 것이다. 갈풀 울력은 세대당 하루에 넉 짐씩 해야 했는데 풀을 사는 집 논까지 지어다 줘야 하는 일이었다.
동네까끔뿐만 아니라 주인 있는 산은 봄에 잎이 피기 시작하면 나뭇가지에 볏짚을 매달아 풀갓을 표시해 두었다. ‘이곳은 내가 풀을 베어갈 곳이니 절대 침범하지 마시오’ 라는 표시였다. 겨울철 볏짚과 함께 썰어 쇠죽을 쑤어주는 여물을 진뫼마을에서는 ‘초’(늦여름 베어 말린 풀로 낟가리를 해서 저장함)라 하는데 이 역시 누가 베어가지 못하도록 볏짚을 매달아 표시해 두었다.
막 시집온 새 며느리나 때는 고급 싸재비 나무 아버지가 이장을 보던 때였다. 당시 아버지는 마을일을 본다는 핑계로 날마다 밖으로 나돌아 나뭇간에 땔나무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울력을 통해 동네까끔에서 해온 나무를 우리집 마당에 부리게 했다.
“나무 참말로 기똥차게 좋네. 파싹 말려서 때먼 불끝도 좋제, 까시(가시)도 없제, 풋나무처럼 버르르 타지도 않제, 인자 월곡양반은 큰 소리 뻥뻥 침선 살겄고만.”
풋나무(새나무)는 없고 싸재비가 대부분인 동네까끔 나무는 마을에서 단연 최고의 질을 자랑했다. 가시에 긁힐 염려도 없고 매운 연기도 나지 않으니 막 시집온 새 며느리나 때는 고급 나무였던 것이다. 버르르 타버리는 풋나무에 비해 오랫동안 타는 싸재비 나무는 불 때면서 잠깐씩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동네까끔에서 해온 나무는 절대로 쇠죽 아궁이에 때지 않고 밥하는 아궁이에만 땠다.
땔나무 울력 하던 날이면 길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내가 먼저 지게 받쳤응게 이 근방은 절대 침범 헐 생각 말어, 잉!” 하던 그 소리들 떠오른다. 싸재비나무 한 짐씩 짊어지고 줄줄이 강변 오솔길로 걸어나오던 나무꾼들 눈에 아른거린다.
이제는 텅 빈 마을 무너진 돌담 사이로 떠오르는 기억들. 강변마을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게 해 주었던 그 나뭇짐들처럼, 내 맘속에 차곡차곡 쟁여진 추억들은 언제나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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