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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뫼마을 앞 섬진강변의 밭에서 한데 어울려 산두 심는 어머니들. 2004년 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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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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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산으로 빙 둘러쳐져 있는 진뫼마을. 하도 골짜기여서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가던 조상들이 ‘여기 숨어 지내먼 암도 몰르겄고만’하며 안심하고 눌러앉은 것이 세월 지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피난민들 서로 도와 터를 닦아 집을 짓고, 논을 만들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골짝골짝마다 다랑이논을 만들고, 밭을 만들고, 호미질하기도 힘든 비탈진 앞산까지 밭을 개간해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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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변 곳곳에 심겨진 나무들도 울력으로 심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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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옛 징검다리를 대신해 지난 2001년 추석 때 고향을 찾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놓은 새 징검다리. 작업을 하는 동안 예전 징검다리에 얽힌 추억들을 풀어내느라 내내 행복했다. 옛 징검다리가 놓여 있을 때도 여름철 폭우에 징검다리 돌들이 급류에 떠내려가기 일쑤여서 마을 사람들이 울력을 통해 돌들을 다시 이어놓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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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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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 한 주먹도 살같이 피같이 알던 부모님들께서 큰맘 먹고 내놓은 땅들이 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지금의 길이 되었다. 그 길을 넓히기 위해 금싸라기같이 귀하고 아까운 농토를 내어놓았던 부모님들을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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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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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울력 전성시대 조상 대대로 농사가 천직이었던 마을사람들은 ‘길’이라는 명목으로 땅을 허투루 내주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5∼6학년 때까지 마을 안길이라는 것은 모두 논두렁이나 밭두렁이었다. 책보 메고 집을 나서면 옆집 오금이네 돌담을 돌아 밭둑길 걸어(현재의 마을회관과 오금이네집 돌담 사이) 큰집 텃논 논두렁길을 오른쪽으로 돌아 다시 앞둑 논두렁길을 따라 정자나무 쪽으로 꺾어나가는 논밭두렁 길을 거쳐 강변길로 향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던 70년대 초, 오금이네 돌담 앞쪽에 있는 텃밭이 공터로 변했다. 마을에서 텃밭을 샀는지 국기 게양대가 세워지고, 새마을운동 깃발이 펄럭이고, 마을회관이 지어졌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리기다소나무 껍질 벗겨 세워둔 나무 맨꼭대기에 매달아 놓은 스피커에선 새마을운동 노래가 매일 아침 울려 퍼졌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진뫼마을엔 날마다 타율적인 울력이 실시되었다. 돌담을 허물어 블록담으로 바꾸고, 농로도 넓히는 대대적인 울력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스스로 나서는 자율적인 울력엔 ‘읏샤 읏샤’ 의욕에 넘치는 소리가 가득했던 것에 반해, 정부의 지시에 의한 타율적인 울력은 억지로 하는 일이다 보니 일하는 내내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농사일이 코앞에 닥쳐와 맘은 바쁜데 날마다 새마을운동에 동원되다 보니 짜증도 나고, 마을길 넓힌다고 금싸라기 같은 개인 땅을 보상 한푼 받지 못하고 내줘야 하니 울력은 날마다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누구여! 누가 여긋따 말뚝 꽂아라고 혔어!”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어느 해 이른 봄 아침이었다. 그 날도 마을길 넓힌다고 말뚝에 ‘사내키(새끼)줄’을 묶어 마을회관 앞에 있는 우리 텃밭에 줄을 대고 있었다. “누구여! 누가 여긋따 말뚝 꽂아라고 혔어! 당신네 땅 같으먼 고로케 많은 땅이 들어가게 꽂겄어?” “나라에서 차 팡팡 지나다니게 내라고 혔다고 안 헙뎌. 구루마나 지나가게 쫍게 내먼 되겄소. 여긋따 꽂았다가는 면에서 나오먼 이장만 디지게 깨질 것이고만.” “그럼 자네가 내 땅 사서 넣소. 돈 있으먼 당장 내 놓고 사서 너봐란 말이여! 이 밭이 어떤 밭인 중 알아? 애새끼덜 밥 굶기감선 쌀 팔고 돼지새끼 팔아서 산 땅이여. 금싸라기 같은 땅이 들어강게 시방 속에서 열불이 나 죽겄고만 얼토당토 안허게 줄을 꽂을라고 허네.” 우리집 텃밭과 정수형님네 텃밭 사이에 난 좁은 밭두렁길에서 아버지는 한 뼘이라도 땅을 덜 내주려고 마을사람들과 옥신각신 싸우고 있었다. 말뚝에 묶어진 새끼줄은 멀리 내동댕이쳐지고 아버지 고함소리가 계속되자 이장은 다른 길부터 먼저 내자며 마을 사람들을 다른 작업장으로 이동시켰다.
다음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다시 우리 텃밭에 모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아침 일찍 다시 꽂아놓았는지 우리 텃밭 깊숙이 꽂아둔 말뚝을 발견한 아버지, “어떤 놈이 또 꽂아놓았어!”성을 내며 말뚝을 내뽑아 던져버렸다. 이장님도 이번에는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넘덜 집도 다 양보히서 시방 넓게 질을 내고 있는디, 여그만 쫍게 내먼 되겄소? 왜 그렇게 양보헐 줄을 모르요. 마을 정중앙에 있는 길이라 쫍게 내노먼 우리동네 찍히서 밀가루 한 푸대도 안 나와 불어라우. 질 낸 짐에 차 들어댕기게 제발 양보 좀 헛쇼. 나도 금싸라기 같은 논이 시방 겁나게 들어가 부렀고만….”
“그럼 자네 땅이나 차 팡팡 들어오게 더 내 놓소. 나는 더 이상 절대 양보 못헝게 그리 알아. 보상 한 푼 못 받고 땅 내놓을랑게 속에서 열불이 나서 엊저녁에 한숨도 못 자 불었고만 무장무장(점점) 파고들어 올라고 히쌌네. 내 최대한 양보히서 여긋따 말뚝 꽂아 놀텅게 더 이상 파고 들어올 생각 말어.” 큰 맘 먹고 아버지가 양보해 말뚝 꽂아 놓은 새끼줄 따라 주춧돌을 놓으며 돌을 쌓아가고 있는데 이번엔 새끼줄 밖으로 ‘삐툴빼툴’ 돌이 튀어나왔다고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 줄 쳐진 대로 빤듯이 독을 놓으먼 될 것을 자꾸 삐딱허게 밭을 파 묵어 들어옴선 ‘기소(초석)’를 놓고 놓네. 자기들 밭 같으먼 고로케 안 놓을 것이여. 시방 속에서 천불이 난 줄도 모르고 자기덜 멋대로 쌓을라고 허네.”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님 친구들 모두 새마을운동 울력에 동원되던 ‘울력 전성시대’. 흙 한 주먹도 살같이 피같이 알던 부모님들께서 큰맘 먹고 내놓은 땅들이 지금의 반듯한 길이 되었다. 마을 안길까지 자동차 몰고 들어다니는 우리 세대들은 물론 후세들도 그 마음 잊지 않고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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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당시, 길 넓히기 울력에 나선 진뫼마을 청년·처녀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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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님 친구들 모두 새마을운동에 울력에 동원되던 '울력 전성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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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금이네집 돌담 앞, 텃밭에서 울력중인 아버지들. 왼쪽부터 명환이양반, 박샌양반, 동팔이양반(내 아버지). 오금이네 변소 뒤로 우리집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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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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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디 점심 묵고 나올 때는 뽀뽀 한번씩 허고들 나옷쇼” 1978년 봄,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집에 와 있었다. 봄비에 불어난 강물이 징검다리를 위협하며 언제든 넘쳐흐를 수 있다는 듯 콸콸 소리를 질러대던 봄날이었다. 정부에서 마을 앞 강변에 미루나무를 심어 나무가 자라면 마을운영자금으로 베어 쓰라고 묘목이 나왔다. 마을사람들은 지게에 묘목을 짊어지고 줄을 지어 징검다리를 건넜다. 남자들만 울력을 하는 게 아니라 남녀 모두 한 집에 두 사람씩 나오는 울력이었다.
마을 앞 강변은 돌자갈땅이라 땅이 잘 파지지 않았다. 모두들 힘이 드는지 묘목 심는 내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직 점심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배가 탁 고픈 것이 점심때가 다 되었는갑네요. 여긋까지 심고 점심 묵으로 갑시다. 근디 점심 묵고 나올 때는 각시 보듬고 찐허게 뽀뽀 한번씩 허고들 나옷쇼. 늦게 나와도 뭐라 허지 않을 테니까.”
이장이었던 판조 형님이 때아닌 뽀뽀 이야기를 내놓아 조용하던 울력판을 웃음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기왕 하는 일이니 환한 얼굴로 하자는 얘기였다. 마을에서 이뤄지는 울력은 종류도 다양했다. 떠내려간 징검다리 다시 놓기, 농로 넓히기, 버스 타러 나가는 중전길 평탄 작업하기·길가 풀베기, 버스도로 담당구역 풀베기, 옴쏙옴쏙 파인 도로 자갈 채워 평탄 작업하기, 초등학교 신축 교실 터 파기, 마을길 청소하기, 동네 산에 자란 땔나무·풀(퇴비) 베어오기, 산림지 조성 산에 나무심기 등. 내가 보고 기억하는 것 이외에도 많은 작업들이 울력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급한 농사일들을 서로 팔 걷어붙이고 도왔던 품앗이 품앗이는 또 어떠했던가. 순전히 손으로 농사짓던 시절, 품앗이가 없었더라면 논농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논갈이 소품 갚기, 모내기, 풀매기, 벼베기, 탈곡 등 그 많고 힘든 일들을 품앗이로 추려나갔다. 밭농사 역시 밭갈이 소품 갚기, 거름 내고 씨앗 뿌리기, 풀매기, ‘밭가상(가장자리)’ 풀 베기, 보리 베기, 닥나무 베기 등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 급하고 바쁜 일들을 서로 팔 걷어붙이고 돕는 품앗이로 추려나갔다.
그 외에도 밤나무밭 풀베기, 겨울밤의 ‘삼 삼기(삼 끝을 이빨로 두 갈래로 가른 다음 무릎에 대고 비벼서 잇는 작업)’등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서로 도와가며 해냈다. 품앗이란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닥나무 심어 놓은 콩밭에서 나란히 밭 매던 어머니들 모습이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땅에서 푹푹 솟아오르는 열기 속에서 먼지 나는 땅을 호미로 득득 긁으며 풀을 매던 어머니들. 그 때마다 콩밭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콧노래가 애절하게 울려나왔다.
“사는 것이 팍팍히서 걍 흥얼거리며 호맹이질허는 것이여. 어치게 자식들 갈쳐서 저그덜 스스로 앞가림 허고 살 것인가, 다음주 일요일까지 챙기야 헐 돈이며, 그 돈은 또 어치게 만들어 갚아야 헐지, 지금까지 여그 저그서 내온 빚, 뭐설 히서 갚아야 헐지, 내 죽을 때는 자식들 앞으로 빚은 안 걸머지게 히 놓고 죽어야 헐턴디…, 뭐, 그런 생각들을 중얼거리는 것이제. ” 내 어머니 월곡떡이나 세운이네 할머니, 둔내떡, 순창떡 모두 그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늘에 앉아 있어도 땀이 주르르 흐를 정도로 푹푹 찌는 한여름, 콩 한 주먹이라도 더 건져내려고 열심히 풀을 매며 부르던 그 노래들 지금도 귓전에 아련하다.
400년 넘게 ‘읏샤 읏샤’ 힘을 내서 서로 돕고 살던 섬진강 상류 두메산골 진뫼마을. 이제 늙으신 부모님들 몇 분만이 지키는 고향 마을에선 울력도 품앗이도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강변엔 보송보송 피어나는 갯버들 기지개를 켜는데 마을엔 정적이 흐른다. 이 세상 나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가르쳐 준 작은 세상, 서로 힘을 도와 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깨닫게 해 준 나의 고향 마을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