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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수 가난한 시절 줄줄이 태어나 물살에 깎이고 씻긴 조약돌처럼 둥글둥글 해맑게 살았던 형제들. 구멍 뚫린 누런 러닝셔츠 하나에 팬티도 없이 긴 바지를 잘라낸 반바지 하나로 여름을 보내야 했던 시절 그리워 지난 5월 셋째 주 주말을 이용해 형제들 모두 고향 집으로 모여들었다.
지난 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듬해 팔려버린 고향 집. 12년 만에 다시 산 뒤 형제들은 일년에 한두 번은 다녀갔다. 그러나 이번처럼 조카들까지 모두 모인 적은 없다. 둘째 형님이 “뭐, 특별한 일은 없으나 부모님이 살아온 발자취도 한번 더듬어 보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들 얼굴도 보고, 고향에 계신 마을 어르신들께 술이라도 한잔씩 대접해드리자”며 모인 것이다.
토요일 오후 가족들은 부모님 묘소에 먼저 들러 고향에 모두 모였음을 알렸다. “먹도 입도 못허고 맨날 너그덜 뒷똥구녘이나 댄다”며 한숨 짓던 어머니는 오른쪽에, 읍내에 나가 학교에 다니는 자식들 주말이면 돌아오니 차비 줄 걱정에 중전마을 윷판을 기웃거리며 ‘고리(개평)’를 뜯어 남 몰래 양말 속에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 숨겨오곤 했던 아버지는 왼쪽에 나란히 풀이불 둘러쓰고 누워있다.
형제들은 ‘이제 어머니 아버지께 돼지 한 마리도 잡아드릴 수 있는데…, 술도 한 상자씩 받아드릴 수 있는데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하는 듯 모두 고개 숙이고 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웃음 한번이라도 더 웃어드릴 걸, 식구들 옹기종기 둘러앉아 김치 하나에 시래기국에 밥 말아 먹던 것이 왕후의 밥상보다 더 좋았다는 걸 회상하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뗏장 두르고 있는 부모님 모습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부모님 앞에 서성이는 동안 나는 잠시 고향 집에 대해 생각했다.
형제들 돌아가며 술 한잔씩 따라 절을 올리고 성묘가 끝났지만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지 묘소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잡풀 뽑아대며 서성이고 있다. 곳곳에 깊이 뿌리내린 쑥을 캐내고 더 이상 캐낼 잡풀이 없자 부모님 아래 쪽에 잠든 셋째 형 묘소로 옮겨 술 한잔 따라 절을 올리고 선산을 내려왔다.
마당 한켠에서 숯불에 고기를 구워 술 한잔씩 돌린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때를 회상하며 부모님과 울고 웃으며 들녘에서 함께 나뒹굴던 옛 이야기 나누며 웃음소리 끊이질 않는다.
ⓒ 김도수 몇 해 전, 큰형님이 돌아가셔서 맏형님 역할을 하고 계신 둘째 형님이 잔을 높이 쳐들고 “우리 형제 조카들 모두의 건강과 화목한 가정을 위하여!”를 선창하자 모두 ‘위하여’를 크게 외친다. 평소 조용하기만 하던 고향 집에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까지 모두 모여 왁자지껄하니 안방 윗목을 지키고 계신 부모님은 오랜만에 기쁨 만끽하며 외롭지 않았으리라. 마음 뿌듯했으리라.
서울 전주 포항 남원 광양으로 뿔뿔이 흩어져 사는 형제들. 고향 집으로 시간차를 두고 모여드는 그 순간이 왜 그리도 좋은지. 맛난 음식 먹는 맛보다 만나는 기쁨의 맛이 가슴 깊이 찌릿찌릿 전해져 와 둥지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형제들 모두 입이 귀에 걸려 있다.
포항에 사는 큰형님 둘째 딸은 “오늘 새벽시장 경매에 나온 문어 중 가장 큰 것을 사왔으니 요 놈 안주를 삼아 다 묵을 때까지 잠자지 말고 놀자”며 꺼내 놓는다. 문어 크기에 놀란 둘째 형님은 “잡아 놓은 돼아지도 시방 겁나게 남았는디 그 놈까지 다 묵을라먼 이틀 동안은 밤 새야겄다”며 껄껄 웃는다.
연방 건배를 하며 잔을 부딪치고 있는데 마을 이장님의 안내방송이 들려온다.
형님 형수 매제 조카들 회관으로 달려가 식사하고 계시는 마을 어르신들께 “반찬은 없어도 많이 드세요” 술 한잔씩 따라드리며 인사를 한다. 마을 사람들은 넷째 형을 보자 “용기 자네 참말로 오랜만이네. 왜 그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단가. 고향에 자주 좀 니롸. 우리들 죽어불먼 고향에 와도 암도 없어”라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형은 술 한잔씩 따라드리며 “모 숭구니라고 애들 쓰셨지요?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공게 늘 건강허셔야 돼요 잉.” 깨복쟁이 친구들과 선후배 되는 자식들 안부까지 일일이 묻고 있다.
태금이네 어머니는 “월국떡, 참말로 고생 많이 힜제. 돈 만들라고 월국양반 몰래 다무락에다 곡석도 무던히 퍼냈제. 하여간 집이들 갈침선 신발 한번 제대로 못 신고 뛰어 댕깄어. 그렇게나 힜응게 요로케 자석들이 모두 잘 되아서 만난게 얼매나 오지고 보기 좋아. 월국떡 살았으먼 시방 좋아서 훌떡훌떡 뛸 것이고만. 우리가 그라니도 이애기 힜싸. 동네에서 집이 식구들처럼 골고루 잘 된 자식들 없다고. 하여간 월국떡이 애기들 갈칠 욕심 하나는 대단헌 사람이었어. 암, 시방 생각허먼 아주 현명한 사람이었제.”
집으로 돌아가는데 뒤따라오던 넷째 형이 내게 말한다. “마을 어르신들 다 모였는디 몇 분이 안 된다 잉. 세상에나! 소주 댓병 하나가 남아부렀어야. 어느새 우리마을도 다 되아부렀다, 다 되아부렀어.”
먹고 살다 보니 한꺼번에 모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몇 번씩 연기를 해서 만났다. 부모님 안 계신 텅 빈 고향 집에 전부 모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건 고향 집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 모두 고향 집 마당에 잠시 발 좀 내디디며 얼굴 좀 보자”는 둘째 형님 당부 잊지 않고 신부와 수녀 조카 4명을 제외하고 모두 29명이 모였다. 회사 일로 토요일 저녁에 잠시 얼굴만 비추고 떠난 전주 조카와 일요일 새벽 눈 비비자마자 떠난 포항 조카 부부가 일찍 떠나버려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1박2일 동안 고향집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꽃 피울 수 있어 좋았다.
고향 집을 다시 샀던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던가. 따뜻한 보금자리로 다시 모여드는 식구들 환한 모습을 보니 지금껏 내가 살아오며 행한 일 중에서 가장 뜻 깊은 일을 한 것 같다.
탯자리 묻은 둥지 떠나 언제든 다시 둥지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고향산천이 주는 포근함이 우리네 삶에 얼마나 활력소와 위안을 주는지,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언제나 응원의 깃발을 내꽂고 휘날리고 있는지 고향에 가면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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