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뫼마을 고향편지

어머니 갈풀 하다 뱀에게 놀란 그 봄날

버들개지 2009. 7. 17. 16:44

 

어머니 갈풀 하다 뱀에게 놀란 그 봄날

ⓒ 전라도닷컴

어머니의 일 욕심은 끝이 없었다. 일을 하다 ‘그만 가자’란 소리를 웬만해서는 잘 하지 않았다.
후텁지근한 날이 계속 되던 늦여름 어느 날이었다. 강 건너 평밭에 있는 콩밭 ‘가상’(가장자리)에 어머니와 함께 풀을 베러 갔다. 풀을 한참 베고 있는데 다급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뜨거라. 나 땡기벌 쏴 불었다.”
“오메! 얼릉 엎드려불어.”

어머니는 재빨리 몸을 낮춰 벌집이 있는 곳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어머니와 좀 떨어진 곳에서 풀을 베던 나도 납작 엎드린 채 옷으로 얼굴을 뒤집어썼다.
눈썹 가까이에 벌이 쏘인 어머니는 주저앉은 채 벌에 쏘인 곳을 손으로 대고 오만 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늘 풀 베기는 여기서 끝났구나’ 싶었다. 그런데 한참을 쉬고 난 어머니는 “조것들이 해필 밭 가상에다 벌집을 지어서 내 속을 상허게 허네. 벌 있는 쪽만 뺑 돌라(둘러) 놓고 비먼(베면) 안 달라들겄제”하며 계속 풀을 베자고 하는 게 아닌가.

밭 가장자리에 자란 풀들은 무성하게 우거져 밭으로 파고 들어와 있었고, 칡들은 밭으로 길게 뻗어 들어와 콩이며 고추며 농작물들을 감아버리고 있었다. 곡식 한 알이라도 더 빼내려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 밭 저 밭 뜀박질하던 어머니로선 벌에 쏘인 고통보다 풀이 파고드는 밭을 그냥 두고 오는 것이 더 괴로우셨을 것이다.

 

“오늘 못 매고 가먼 호랭이 새끼 쳐 가드락 들어오덜 못혀”
평밭 아래 밭에서 어머니와 콩밭 매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오후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제법 굵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곧 그만 매고 가겠지’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꿈쩍도 안하고 계속 밭을 맸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하늘은 캄캄해졌다. 신발에 흙이 달라붙어 발을 옮기기조차 힘들었다.

“오메! 비 옹게 그만 매고 가!” 모기만한 내 목소리에 되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오늘 못 매고 가먼 이 밭은 호랭이 새끼 쳐 가드락(갈 때까지) 들어오덜 못혀. 풀 속에 갇힌 곡식들이 열매 맺는 거 봤냐? 아직까지 비 맞아 죽었단 사람 있단 소리 못 들어봤응게 맬 수 있는 데까지는 매고 가자.”
나는 더 이상 찍소리 못하고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속에 호미질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내 다시는 저리소에 풀 허로 안 갈란다”
그런 어머니가 하루는 진뫼마을 남쪽 저리소산으로 갈풀을 하러 갔다가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어머니가 일하다 그만두고 일찍 돌아온 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어머니는 그 날 도시락을 싸 들고 혼자 저리소산으로 갈풀을 하러 갔다. 처음에는 ‘큰골’ 골짜기에서 풀을 하다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홍두깨 날등’을 보니 풀들이 많아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참 베는데 작은 바위 하나가 나타났다. 바위 옆에 돋은 풀들을 한 움큼 쥐고 막 베려 하는데 아뿔싸! 바로 옆에 엄청난 큰 뱀이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며 어머니를 노려보고 있더란다.

얼마나 놀랐던지 풀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고 있었다. ‘아이고메! 나 죽겄네!’ 어머니는 움켜쥔 풀을 살며시 놓고는 낫이고 뭐고 그대로 놓아버린 채 도망쳐 나왔다.
얼마나 놀랐는지 어머니는 경사가 심한 큰골을 불과 몇 분만에 허둥지둥 내려왔다. 강가 오솔길에 닿아서야 주저앉아 놀란 가슴 쓸어내린 어머니. 힘들게 낫질한 갈풀 다발들을 팽개치고 온 사실을 그때사 알게 되었다. 그 아까운 갈풀 다발들이 얼마나 눈에 아른거렸을 것인가.

“내 코 앞에 큰 배암(뱀)이 나를 노려보며 혀를 낼름거리고 있는디 참말로 죽겄더라. 6·25때 총알이 내 옆에서 툭툭 튈 때보다도 더 심장이 벌렁거리더랑게. 내 다시는 저리소에 풀 허로 안 갈란다.”

깊은 산중으로 시집와 농사일 하면서 크고작은 일을 다 겪었을 어머니는 그 날 뱀에게 놀란 뒤로 며칠 동안 어린 아들에게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어머니가 풀 베다 던져버리고 온 낫은 지금쯤 ‘홍두깨 날등’ 어디쯤에서 이가 빠진 채로 녹슬어가고 있겠지. 낫자루는 썩어 빠져 거름이 되어 나무들 키우고 있겠지.
저리소산에 연둣빛 물감 들이는 봄, 어머니 갈풀 하다 뱀에게 놀란 그 봄날이 또 왔다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