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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강변 미루나무 쓰러지다 2012년 8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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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뫼마을 건너 강변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 덩그렇게 서서 사시사철 강물에 물 담그고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있었다! 슬프게도 이제는 과거형이다. 2004년 7월 전라도닷컴에서 펴낸 나의 책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의 표지를 장식했던 나무다.
미루나무 네 그루는 내 바로 위의 형이 197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이른 봄, 네 형제를 그리며 심었다. 힘든 세상, 형제들이 어깨동무하고 의지하며 우애 깊게 살아가자고 강변에 심은 것이다.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내가 어치게 살아야 과연 옳은 길인지 참 까깝허고 답답허더라고.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밤이면 맨날 방구석에서 고민만 하고 있었제. 그 때는 날만 새먼 갱본에 포프라 심느라 울력을 했는디, 형제들 똘똘 뭉쳐 서로에게 희망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 미루나무 네 그루를 심은 것이여.” 그때 심경을 형은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미루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자 마을에서는 동네 운영자금으로 만들어 쓰자며 모두 베어내 판다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큰아버지께 나는 신신당부했다. “저 건너 우리 밤나무밭 아래 질(길)가테 서 있는 네 그루는 절대로 비먼 안 돼요. 우리 아부지께서도 동네서 심은 포프라가 아니고 우리 용기(형이름)가 네 형제 기린다고 심었응게 내가 없더라도 절대 못 비게 히야 헌다고 말씀허고 돌아가셨거든요.”
큰아버지가 강 건너 미루나무들을 벨 때 계속 지켜 서 있었기에 강변엔 우리 형제 나무 네 그루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2002년 8월23일, 태풍 ‘루사’ 때문에 세 그루는 그만 쓰러지고 맨아래 심어진 나의 나무 ‘막둥이 나무’만 남게 되었다.
이번에 태풍 ‘볼라벤’이 휘몰아쳤을 때도 미루나무가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까 싶어 걱정이 태산이었다. 출근하자마자 마을 이장에게 전화를 했다.
“저 건네 미루나무는 어치게 됐는가?”라고 묻는 내 목소리는 떨렸다. “넘어가부렀어라우.”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말이었다. “근디 형님은 지붕 날라갔는지부텀 물어볼 것이지, 웬 나무부터 물어보요?”라는 이장의 말에 나는 낙담한 목소리로 “지붕은 다시 씌우먼 끝나지만 나무는 안 그러잖어”라고 말했다.
2012년 8월28일, 태풍 ‘볼라벤’이 고향 강변을 외로이 지키던 한 그루 미루나무마저 쓰러뜨린 바람에 나의 애틋한 사랑은 거기서 끝을 맺고 말았다. 심은 지 37년. 몸통은 어른 둘이 손을 잡아야 할 정도로 굵었고, 키는 30미터 쯤 되는 아주 우람한 나무로 자라 있었다.
서울 사는 형에게 곧바로 ‘강변을 외로이 지키던 미루나무, 이번 태풍에 쓰러져 부렀다네. 이를 어쩔고!’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고 믿기지 않았다. 이장은 평소 농담을 잘 한다. 혹시 나를 놀래키려고 거짓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을 품은 채 다시 전화를 했다. 전화 건 목적을 곧바로 못 물어보고 “어느 쪽으로 쓰러졌더냐?”고 물어봤다. “마을을 바라보며 쓰러져 누웠는디 섬진강댐이 방류를 허는 바람에 물이 나무 똥꾸녁까지 달랑달랑 차올라서 지금 밤나무밭 쪽으로 이동해 누워 있고만.”
그렇게 구체적인 답이 나오는 걸 봐서 미루나무는 쓰러진 게 분명했다. 혹시나 했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어쩌다 고향에 달려가지 못하는 주말에도 내 가슴 한켠에 늘 푸르게 서 있으면서, 그 모습만 떠올려도 숨을 편안히 쉬게 해주던 미루나무. 한평생 얼마나 마을만 바라보며 살다 갔는지, 또 고향으로 돌아오는 형제들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마지막 쓰러져 누우면서도 마을을 향해 누웠을까. 나무가 쓰러진 날, 내 가슴 한쪽도 무너져 내렸다.
‘일곱 형제들 다 떠난 고향 지켜줘서 미안하고 고맙다’
며칠 뒤 형은 전화를 해서 “미루나무 어치게 헐래?” 물어왔다.
“밑동만 베어서 어치게 살려볼까 연구도 히 봤는디 그건 안 된다고 허더라고. 허는 수 없이 토막 내서 집 뒤안에다 갖다 둘라고. 버섯이라도 나먼 미루나무가 우리 형제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을 골고루 나눠 묵고. 암튼 오래도록 보관해 둘라고. 그럼선 고향 지키느라 애썼다고, 고생힜다고 허게.”
2012년 9월14일, 태풍 ‘산바’가 한반도로 다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15·16일 이틀 동안 선산을 벌초하는 주일이어서 미리 와이어로프를 준비해 갔다. 그런데 태풍 ‘산바’가 올라온다는 소식에 섬진강댐관리사무소에서 미리 방류를 한 까닭에 강을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물살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 늦게까지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나무 몸뚱이마저 떠내려가 버린다면 휑한 마음 메울 수 없을 것 같아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강을 건너 미루나무에 로프를 고정시켜 놓고, 밤나무에 꽁꽁 동여매 물이 불어도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속해 놓았다. 미루나무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예우였기에 아내가 붙드는 손길 뿌리치고서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일곱 형제들 다 떠난 고향을 씩씩하게 지키며 우리 형제들 오는 모습을 애타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고 고맙다. 그동안 넘넘 사랑했다, 미루나무야.’
-전라도 사람 자연 문화 <전라도닷컴>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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