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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탯줄 자른 고향집 아래채 오두막집. 중앙의 나무기둥 오른쪽은 당시엔 나뭇간이었다. 그 좁 은 방에서 부모님과 여섯 자식이 복닥거리고 살았다. |
| ⓒ 김도수 |
내가 태어난 날은 칼바람 휘몰아치는 섣달 스무 이튿날 저녁이었다. 어머니는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하자 진뫼마을 고향집 아래채에 누워 산고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애기를 받아내기 위해 깔아야 할 볏짚을 헛간에서 내려다 검부러기들을 ‘싹싹’ 훑은 다음 윗목에 놓고는 사랑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산고가 시작되자 어머니는 형과 누나들을 큰집으로 보내놓고 고무신 코가 마당 쪽을 향하게 가지런히 놓았다. 애가 거꾸로 나오지 말고 머리부터 잘 나오게 해달라는, 그리고 순산하여 다시 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다.
어머니는 산고를 치를 때마다 너무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산기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 같으면 곧바로 집을 나가버렸다. 애를 낳을 때마다 그랬다. 내가 태어난 그날 밤도 아버지는 큰어머니께 ‘집 사람 애 낳으려 한다’고 전하고는 동네 사랑방으로 가버렸다.
내가 태어난 다음날 아침, 밤새 얼마나 추웠던지 마을 앞 강줄기가 모두 꽁꽁 얼어붙어 작은어머니는 ‘해붓간(산파역)’ 할 때 나온 피묻은 옷들을 얼음장 깨고서 빨았단다. 강물이 꽁꽁 얼었던 섣달에 나는 섬진강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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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식구가 살았던 기안이 양반네 집 아래채. 몇 년 전 무너져 버리고 내 사진 첩에만 남아 있다.(오른쪽에 보이는 조그마한 방에서 살았다) |
| ⓒ 김도수 |
“며칠씩 굶어서 아무리 쥐어짜도 젖은 안나오제…”
어머니는 나를 임신해 산달이 되어가는데도 주위 사람들이 못 알아 볼 정도로 배가 부르지 않았단다. 애기를 낳고 보니 주먹만하게 생긴 데다 머리통도 뾰쪽하고 뒤통수도 툭 튀어나온, 거기에 눈썹에까지 머리털이 덮여 있어 과연 이 애기가 제대로 사람새끼가 될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단다.
“시방은 요로케 이쁜 놈 새끼가 그 때는 왜 그렇게 요상허게 나와부렀는가 모르겄어. 사람들이 애기를 보러 오먼 포대기 둘둘 말아 윗목 구석탱이 한쪽에다가 살짝 밀어놓아 불 정도였당게.”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식구는 6·25전쟁으로 살림살이가 모두 불에 타버리고 먹을 양식도 부족해 비바람 몰아치는 옆집 기안이양반네집 아래채 오두막집에서 ‘풀죽’을 끓여먹으며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지금의 아래채를 짓고 옮겨오면서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았을 때 태어난 나는 어머니 젖을 먹으며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셋째 형은 어릴 때 다리가 비틀어질 정도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차마 볼 수가 없었단다. 6·25전쟁이 끝나고 평온한 시기가 찾아왔지만 빨치산들이 소를 다 잡아먹어 버려 논을 갈지 못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 대신 사람들이 쟁기를 끌며 논을 갈았지만, 우리집 논은 건답이라 쉽게 물이 빠져 버리니 벼농사가 안됐다. 우리 식구들은 ‘풀죽’을 끓여먹으며 연명했지만, 셋째 형은 너무 어린 탓에 꺼끌꺼끌한 풀죽은 잘 못 먹으니 곡기를 잇지 못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단다.
“이 놈이 혹시 죽어 불먼 내 가슴에 평생 못질을 헐 턴디 어서 농사가 잘 되아서 배불리 먹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겄다”며 어머니는 두 눈 쏙 들어가 힘없이 누워 있는 셋째 형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울었단다.
그런 형은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ROTC 군사 훈련을 받고 와서 갑자기 몸이 아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피난 시절 동굴을 파고 살던 진뫼마을 앞산 끝자락에 있는 평밭. 산비탈진 두메산골에서 제법 평평한 밭들이 펼쳐져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평밭’에서 어머니와 함께 밭을 매다 셋째 형 이야기가 나오면 어머니는 먼지 날리는 메마른 땅을 호미로 ‘퍽퍽’ 찍어대며 흐느꼈다.
“굴 속에서 춥기는 허제, 며칠씩 굶어 불어서 아무리 쥐어짜도 젖은 나오지 않제, 그래서 몇 주먹 아껴둔 쌩쌀을 씹어서 그 뜬물 받아서 믹여 기른 자식인디. 그 놈 새끼가 나를 두고 먼저 가 불다니 하느님도 무심허기도 허제. 그 놈 죽을 때 내가 옆에서 얼굴이라도 한번 비벼 봤으면 이렇게 덜 원통헐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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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도수 | 그 좁은 방에서 여덟 명이 어떻게 잤을까 내가 태어난 날 역시 부엌에 길어다 놓은 물이 땡땡 얼 정도로 몹시 추웠단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새끼줄을 꼬아서 숯과 고추, 목화를 매달아 대문 앞에 금줄을 쳤다. 우리집에 오는 사람들 중 혹시 짐승을 살생했거나 궂은일을 당한 사람들은 절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고추를 매달면서 ‘나는 아들을 다섯씩이나 낳았응게 인자 큰 부자가 되아부렀고만’ 아버지 입가엔 환한 미소가 떠올랐을 것이다. 사흘째 되던 날에는 윗목에 볏짚으로 쌓아둔 탯줄을 꺼내 깨끗이 태우며 ‘복 많이 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을 것이다.
탯줄 자른 고향집 아래채 오두막집은 사람 서너 명 누우면 꽉 차는 아주 좁은 방이다. 지금 아래채 중앙에 서 있는 기둥나무 오른쪽은 나뭇간이었다. 그곳까지 방으로 만들어서 그렇지 나뭇간을 빼면 방이 얼마나 작았겠는가?
그 좁은 방에서 여덟 명이나 살았으니 밤이면 어떻게 잤는지 몹시 궁금하다. 한번은 하도 방이 작아 보이길래 아이들과 함께 식구 4명이 누워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칼잠을 잤더라도 부모님과 여섯 자식이 어떻게 잠을 잤는지 풀지 못할 수수께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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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를 하나 사다가 아이들과 함께 조각칼로 새긴‘月谷 山房(월곡산방)’. 내가 태어난 아래채에 걸어두고 내 어머 니 ‘월곡떡’을 향한 그리움을 달랜다. |
| ⓒ 김도수 |
아침밥 지을 양식이 없어서 부엌을 서성거리던 어머니 겨울에 태어난 나는 생일날이면 언제나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반면 내 바로 위 형은 아껴두었던 쌀 한줌을 보리쌀 위에 얹어 생일상을 차렸다. 형 생일이 꽁보리밥 먹는 여름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형에게 생일날 아침이면 자랑을 했다. “성(형)! 성 생일은 보리밥 묵는 여름철이제. 내 생일은 쌀밥 묵는 겨울철이지롱.” 형은 흰 쌀밥이 ‘고봉’으로 수북하게 담긴 내 생일상을 바라보며 무척 부러워하곤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 생일이 돌아오면 무명실 꼬아서 심지를 만들고 접시에 들기름 붓고는 상 위에 올려놓고 액운을 태웠다. ‘내 자식 짧은 명은 길게 해주고 진(긴)명은 새리(쟁여) 담고 그저 앞날이 술술 잘 풀려나가게 복을 많이 달라’며 두 손 싹싹 비비고 있었다.
생일날 아침이면 내가 태어난 아래채 방을 떠올리며 아침밥 지을 양식이 없어서 차양도 없는 부엌을 서성거렸을 어머니 얼굴을 그려본다. 그래서 집을 산 뒤 겨울방학 때 도마를 하나 사다가 아이들과 함께 조각칼로 ‘月谷山房(월곡산방)’을 새겨 아래채 방 입구에 걸어 놓았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 은혜’ 잊지 않기 위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달래기 위해 택호를 따서 ‘월곡산방’이란 현판을 걸어 놓았던 것이다.
진뫼마을엔 이제 늙으신 분들만 몇 분 살고 계셔서 태어날 아이가 없으니 아들을 낳으면 숯과 고추·목화를, 딸을 낳으면 숯과 솔가지·볏짚을 꽂아서 금줄을 치던 모습 사라진 지 오래다. 어머니가 깨끗이 몸단장하고 생일상 차려진 윗목에 앉아 자식새끼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모습이 너무도 그리운 섣달 스무 이튿날 아침이다. |